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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4] '수련'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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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44] '수련' 앞에서 윤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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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광회화(外光繪畵). 야외에서 빛의 변화에 따라 그리는 풍경화. 인상주의 미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실내 화실에서 완성하는 그림이 아니라 야외에서 자연의 빛 속에 노출된 채 변화하는 빛과 사물을 표현하려는 화풍을 일컫는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는 실증주의와 닮았습니다.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그의 <인상, 해돋이>가 실제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를 추적하는 흥미로운 연구도 있습니다. 모네가 서른두 살 때 프랑스 북서부 르아브르항 라미라우테 호텔 3층에 머물면서 그린 거랍니다. 어느 미술사가가 모네의 일기를 훔쳐 본 것일까요? 연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도널드 올슨이라는 미국의 천문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우주적 차원’의 분석 도구를 활용해 작품 속에 재현된 시간과 공간을 찾아냅니다. 모네의 생애 조사, 그림 속 환경의 실제 장소 관찰, 해 돋는 위치와 각도 등을 살펴본 결과 1872년 11월 13일 오전 6시 35분이라는 작품 탄생의 순간까지 밝혀냅니다. 이 정도면 세기의 화가를 위해 바치는 천문학자의 헌사가 아닐까요? ‘인간의 눈’보다 ‘우주의 눈’이 실제에 훨씬 가깝다는 판단이지요.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는 인간의 기록보다 천문의 기록이 훨씬 더 오차가 없다는 ‘과학적 실증주의’가 제 목소리를 내는 경우입니다.


모네는 같은 사물이라도 빛에 따라 변화가 무쌍한 대상을 주목합니다. 수면에 누운 듯 퍼져 가면서 피는 꽃. 빛에 따라 색깔이 섬세하게 변하는 수련이 적격이지요. 파리 근교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자신의 집 정원에 연못을 파고 수련을 키우면서 그린 작품이 250점. 그 중에 대표작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수련> 연작입니다.


25미터 길이의 타원형 전시실 벽면 가득히 작품 4점이 걸려 있습니다. 전시실이 나란히 두 개 있으니 전부 8점. 동쪽 방엔 아침 햇살 속에서 보는 수련을, 서쪽 방엔 저녁노을 속에서 보는 수련을 전시했군요. 타원형 벽면을 따라 길고 커다란 액자가 휘어진 채로 붙어 있습니다. 미술관을 설계할 때, 전시할 작품을 미리 생각해둔 것이지요. 대작의 패널을 왜 부드럽게 휘어지게 했을까요? 특별한 시각 효과를 위해 일부러 작품을 휘게 제작하고, 그걸 전시하기 위한 공간을 타원형으로 설계한 건 아닐까요? 오랑주리 미술관. 원래는 튈르리 정원 안의 오렌지 농장이었지만 <수련> 전시를 위해 맞춤형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44] '수련' 앞에서

미술관 천정은 전체가 유리로 덮여 있어 빛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수련>이 전시된 타원형 방에만 유리 천정 아래 반투명 가림막이 있네요. 직사광을 피하고 반사광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장치일 테지요. 모로코의 강렬한 햇살과 영국의 흐린 하늘을 적당히 섞은 듯한 빛의 연출. 유리를 통해 들어온 빛은 은은한 반투명 가림막을 지나는 동안 한 번 더 부드러워지는군요. 전시실 벽면 전체를 흰 색으로 하고 자연광이 들어오는 조건으로 작품을 기증한 예술가. 모네는 자기 작품이 빛과 함께 살면서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창안한 예술가입니다.


<수련> 연작은 간접반사의 자연 채광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닫습니다. 모네가 설계사에게 요구했을 테지요. ‘타원 공간 안에 자연의 빛이 오래 머물러 부드럽게 살아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침과 저녁에 볼 때의 느낌이 어찌 같겠습니까. 처음 오전 방문 때는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하늘이었습니다. 날이 개어 화창한 햇살이 쏟아질 때 다시 보니 처음 느낌과 미세하게 다릅니다. 백 년 전 연못이 시간의 장벽을 뛰어 넘어 제 앞에 살아 있는데, 연못의 수련들은 오늘만 해도 시시각각 다르게 태어나는 중이지요. 제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모네의 수련이 아니라 제 몸 안에서 빛의 하모니로 영생하는 저만의 수련. 그러므로 모네의 <수련>은 바라보는 모든 이의 <수련>이 됩니다.


수면에는 보라색, 진홍색, 초록색, 연두색…, 다채로운 생명의 색들이 율동을 합니다. 평화와 고요와 아늑함도 있지요. 그 사이 사이엔 푸른 하늘도 얼비치고 구름도 은은하게 흐릅니다. 모네 할아버지는 구름 몸에 바람 감기는 소리도 표현하는군요. 물의 잔주름너머 깊숙한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폴 발레리 시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도 함께 불어나오네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삶의 최고의 느낌은 가슴 뛰는 일. 누구든 가슴 뛰는 일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백내장으로 앞도 잘 안 보이는 상황.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불굴의 예술가는 회화사의 새로운 문을 열어 나갑니다. 그림의 생명이란 제 안에 빛을 품어 안는 것. 스스로 주인이 되어 언제, 누구 앞에서든 살아 있는 것. 마침내 보는 사람의 가슴에 안겨 새롭게 박동하는 생명이 되는 것! 모네의 <수련> 앞에 서서 저는 영생의 비밀을 이렇게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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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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