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트렌치코트 행렬이 유별나다. 긴 겨울 버텨온 롱패딩을 벗고 쇼트패딩까지 접은 다음 두 개 패션 무기, 패션 투쟁이 찾아들었다. 레깅스와 트렌치코트. 이 둘은 입는 자도 다르고 입성 모양도 딴판이지만 둘 다 같은 속성을 타고 왔다. 마이너스 성장, 역성장. 크게 망가진 우리 경제 허물어진 담장을 마저 부수며 진격해오고 있다.
레깅스(Leggings)를 입는 자들은 너무 무거운 불황에 주눅 들지 않으려 한껏 과감하게 도발하며 시위하고 다닌다. 입춘 이후 겨울 끝물부터 한강 공원이며 성수동 카페 거리 언저리마다 레깅스와 추리닝 쫄 바지가 주도하는 애슬레저 룩(athletic과 leisure를 합친 용어. 일상복의 경계를 허문 가벼운 스포츠웨어)이 부쩍 늘어났다. 처음에는 사이클 운동복으로 입회했다가 필라테스, 요가, 중ㆍ고등 학원까지 온갖 인도어 전용 복장들이 거리로, 공원으로, 캠퍼스 아웃도어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착 달라붙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터라 아저씨 앞면이며 청춘들 뒤태까지 민망할 적도 많으니 되레 더 화젯거리다.
레깅스 패션 전령 뒤로 더 크고 도도한 백만 대군 쯤 되는 메가트렌드가 뒤따랐다. 삼사월 꽃샘추위가 그리 혹독하더니 유행 좀 탄다는 청년들 모두가 트렌치코트로 일대 변신을 했다. 대로변에도 골목길에도 정류장에도 교실 복도에도 저마다 수십 종 수백, 수천 명 트렌치코트 모델들이 가득하다. 평창올림픽 전후로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코리안 윈터 룩인 검정 롱패딩 물결과는 또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능수능란하고 다양한 개인 연출이 한 시기를 지배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과거 노란머리 염색이나 남자 파마, 아니면 일본 신주쿠에서 비롯됐다 하는 신인류 펑크족 때하고도 또 다른 강한 문화 충격을 요즘 곳곳에서 느끼고 있다.
현상과 인식. 트렌치코트 하나가 별안간 계절풍보다 더 강력한 지배적 트렌드로 등극한 현상 그 너머 도사린 원인은 무엇인가? 독특하고 범상치 않은 대유행에는 반드시 불을 지핀 원인이 있을 터이다. 불경기에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속설이 있어왔던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레깅스와 트렌치코트 유행이 불을 뿜었던 1분기 우리 경제는 마이너스 역성장을 하고 있었다. 1분기 경제 성장률이 -0.3%로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았다. 이 가운데 기업의 투자 부진과 관련된 설비투자가 -10.8%를 기록하는 등 하락 폭이 컸다. 한국은행은 과도하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추진한 지 2년 만에 드러난 참패에 사람들은 그저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그 한숨과 분노에 꽉 다문 입술, 부릅뜬 눈으로 고른 전투복이 바로 문화트렌드로만 흘려보낼 뻔했던 트렌치코트 패션이다. 청년들이 한국, 2019년 1분기라는 지독한 시절을 버티면서 꺼내 든 중무장 인정 투쟁 복장이 곧 트렌치코트라는 얘기다. 본디 트렌치란 도랑, 참호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 안에서 영국군 장교가 입은 외투에서 유래하기도 했다.
이번 한국의 트렌치코트 열풍은 그냥 복고와 편함 같은 감성, 기능성 해석만으로 끝날 성질이 아니다. 무정치, 탈경제 순수 문화로 얼버무릴 순 없다. 지금 당장 10만원짜리 트렌치코트 한 벌 아니면 숨 한 번 크게 쉴 수도 없어 기어이 저항하고 마는 정치경제학, 혁명의 인정투쟁임을 꿰뚫어야 한다.
청년들은 지금 패스트트랙 아닌 패스트힐링을 해가며 현실을 버티고 있다. 트렌치코드 걸치고 참호전 치르는 전사의 심정으로 학교 가고 직장 가고 중간고사 보며 아침저녁으로 전투를 치르며 산다. 경제가 마이너스 역성장 나락으로 빠지는 비참한 실내ㆍ실외 공기를 방어할 자기 장치 한 장이 필요할 따름이다. 트렌치코트 나부끼는 최소한의 운동성 아니고서는 '나'라는 존재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여유 없는 사회에 질려버린 굶주린 영혼들이 너무 많다.
마이너스 역성장과 트렌치코트 일대 유행.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웬만큼 나아가는 정상 경제 호조세였다면 레깅스 말고, 트렌치코트 말고 더 화사하고 멋진 옷으로 웃음 지었을지 모른다. 평화롭고 든든하고 희망찬 실물경제 공기가 벚꽃보다 향기롭고 아디다스, 버버리보다 더 편하고 따뜻했다면 별도로 외모와 외관에 이만큼 힘주지 않았을 게다.
철학자 헤겔이 간파했듯 인정투쟁은 좌파, 우파 그 어떤 정치 종교 사상보다 더 강력하고 본능적이다. 우리 청춘들이 트렌치코트를 일제히 두르고 온몸으로 싸우는 때 아닌 인정투쟁의 뜻과 무게를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의 항변을 받아들이고 새겨 인정해야 할 때다. 몸부림치는 패션 저항이 자칫 낙망과 급변 사회 정치 운동으로 번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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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한국문화경제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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