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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4]세고비아의 돌다리 물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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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4]세고비아의 돌다리 물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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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는 마드리드 북서쪽에 있는 중세의 도시입니다. 2000년 전에 세워진 로마 시대의 수로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지요. 버스터미널 인근 아소게호 광장에 있습니다. 2만 개도 넘는 돌조각들을 접착제도 없이 28m 2층 높이로 728m나 이어 붙인 ‘장관 중의 장관’입니다.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네요. ‘수도교’도 ‘송수관’도 아닙니다. 스페인어 아쿠아 둑또(Acue ducto)는 ‘물을 옮기는 배관’이란 뜻이죠. 먼 강에서 물을 끌어와 도시에 공급하는 기능을 하니까 기능상으로는 수도교나 송수관이 맞습니다. 헌데 말맛이 없습니다. 우리말을 골라 입 안에서 굴려봅니다. 물. 길. 다리. 돌. 단어들을 이리저리 조합해봅니다. 돌다리 물길이 좋네요. 강물이 흘러가는 느낌이 듭니다. 저 혼자 가만히 불러봅니다. 세고비아의 돌다리 물길.


한쪽 방향으로만 지나치게 길게 이어진 돌 건축이어서 안정감이 걱정되는데 지난 2000년 간 저토록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걸 보니 로마 건축술에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하중을 분산시키는 아치형 구조가 안정감의 비밀이 아닐까 싶네요. 무지개 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반원형 공간을 만들면 위에서 누르는 하중이 분산되는 원리를 활용하는 거죠. 아치는 로마의 독특한 건축기술이었습니다. 아치를 길게 늘여 대나무 갈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을 만들면 볼트가 되고, 아치를 회전시켜 반구형 천정을 만들면 돔이 됩니다. 아치와 볼트와 돔은 로마에서 꽃피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진 ‘건축의 지혜’입니다.

세고비아의 돌다리 물길은 아름답고 튼튼한 아치들이 아래위로 구성되어 일렬횡대로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마치 아빠 어깨 위에 무동 서 있는 아이들이 양팔을 잡고 줄지어 선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돌 건축물에선 왠지 사람 냄새가 납니다. 질서정연한 집단무용을 감상하는 기분이죠. 저 멀리 머리에 흰 눈 쓰고 있는 과다라마 산에서 가져온 검은 화강암들이니 백두옹(白頭翁)이 그 자손들을 인간세계에 보내 물길이 되도록 한 거네요.


재미있는 건 또 있습니다. 낱낱의 돌들이 쌓이면 미세한 흔들림도 있을 테지요. 통짜배기 돌이나 시멘트 콘크리트보다 탄력이 더 생기지 않을까요? 접착제를 쓰지 않고 2만 개 돌들끼리 서로 긴장하면서 균형을 잡는 공법. 1번 돌이 2만 번 돌까지 영향을 미치는 관계. 완벽한 공동체의 개념이 돌과 물을 만나 지상에 실현되는 경우죠.

[윤재웅의 행인일기 24]세고비아의 돌다리 물길 앞에서

저 혼자 이런 생각해봅니다. 아름다운 겉모습과 뛰어난 축조술에 감탄할 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공동체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람 2만 명, 이렇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요? 저마다의 자유와 권리와 제 위치를 존중해 주면서 전체를 아름답고 안정되게 만드는 관계 말입니다. 전체주의는 통짜배기여서 지진이나 충격에 위험하고, 민주주의는 자유롭기는 하나 어지럽고 시끄럽기 마련이죠. 여기 ‘오래 새로’ 된 그 정치철학의 대안이 있습니다. 사람 관계의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배우려면 한 번쯤 세고비아 돌다리 물길 앞에 서 보기를 바랍니다.


이 돌다리 물길은 도심을 가로질러 알카사르까지 물을 공급했을 겁니다. 알카사르는 14세기 중엽에 지어진 성채. 이사벨라 여왕의 즉위식이 있었던 곳이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의 주인공이 살았던 성의 모델이라고도 하네요. 문 입구에 로마 병정 차림의 사내가 서 있습니다. 사진을 찍자 하면 뒤돌아섭니다. 1유로 주면 활짝 웃으며 같이 사진 찍습니다. 웃음 짓는 로마 병사. 2000년 전 병사들도 이렇게 웃기만 했을까요? 돌 위를 흐르는 물도 즐겁게 노래하기만 했을까요?


돌 위를 흐르는 물은 아마도 돌을 많이 울렸을 겁니다. 정복자의 창검 아래 무수히 쓰러진 사람들. 그 피와 고름과 상처가 증발하여 구름 같은 데 모여 있다가 비가 되어 내려와선 강물로 갔을 텐데요. 그 강물 끌어와 돌길에 흐르게 하니 돌인들 어찌 울지 않겠습니까. 목숨은 생마다 다른 모습으로 돌고 돌아 가없이 떠다니는 나그네일진대, 이토록 반복 지속되는 생로병사를 물인들 돌인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만해 한용운의 명시 〈알 수 없어요〉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부드러운 물의 손길이 무심한 돌을 어루만지고 가면 무뚝뚝한 돌도 운다는 상상력입니다. 헌데 그 물은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난다고 합니다. 오늘 내가 마시는 이 물 속엔 2000년 전 조상의 피도 조금, 땀도 조금 들어 있다는 뜻 아니겠는지요. 순환하는 에너지는 돌고 돌기에 근원이 없다고 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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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다리 물길에 물 흐르지 않습니다. 1884년까지만 흘렀다는군요. 2000년 간 세고비아의 식수원이자 생명수였던 저 물. 오늘은 물 흐르지 않아 돌들도 울음을 멈추었을까요? 2만 개의 돌들은 무어라 속삭일까요? 돌기둥에 붙어 서서 가만히 귀를 대어봅니다. 아듀~ 2018.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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