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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5] 샹폴리옹 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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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5] 샹폴리옹 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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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작. 파리에서 600㎞쯤 떨어진 프랑스 남부 지방 작은 도시입니다. GR65 순례길의 경유지여서 구름 따라 물길 따라 가다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오후 햇살 찬란한 셸리 강가. 시인 김영랑이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고 노래했던 저 강물. 아무리 서러워도 그 슬픔 극복하는 빛나는 윤기를 영랑은 ‘촉기’라 불렀습니다. 식민지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 예술가의 자존심을 여기 빗대기도 했죠. 영랑은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서러운 밝음. 찬란한 슬픔. 못내 스러져 갈 찬연한 색채들. 그런 생로병사의 파노라마들. 모두 다 촉기입니다. 생명, 생기의 다른 이름이죠.


셸리 강물과 오후 햇살이 그랬습니다. 구름의 몸포 속에, 뻐꾹새 울음 속에, 초록 이파리들 속에, 에메랄드빛 강물의 속살 속에, 영랑영랑 흘러가는 저 촉기들. 새소리, 수풀수풀, 풀냄새, 귓불 스치는 바람결…. 그리고 혀 안을 감도는 액상프로방스 포도주의 맛. 오감의 문을 다 열어놓고 저는 잠시 촉기의 고향에 몸을 맡깁니다. ‘문자속’만으로 안 되는 감각 경험이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일 테지요.

암행어사 이도령이 옥중 춘향의 편지 전하러 가는 방자를 만나 그 내용 보려고 설득하는 <춘향전> 대목에 ‘문자속은 기특하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부공총총설부진(復恐??說不盡)’하여 ‘행인임발우개봉(行人臨發又開封)’이라. 급히 쓰느라 할 말 다하지 못한 것 같아 편지 전하는 이가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열어본다! 유식한 시 구절 인용하니 뜻도 모른 채 설복당해 방자가 하는 말이 바로 ‘문자속은 기특하네.’입니다. 행색은 초라해도 아는 건 참 많구려! 이런 뜻인 게지요.


[윤재웅의 행인일기5] 샹폴리옹 박물관에서

문자는 지식의 최전선이요 문명의 선봉장입니다. 문자 이전의 강물과 햇살은 문자 이후의 그것과 많이 다릅니다. ‘엄마의 길고 따뜻한 팔이 땅에 내려와 내 몸을 만지고 간다.’는 ‘햇살은 밝고 강물은 흘러간다.’로 바뀝니다. 느낌은 기호로, 감각은 지식으로 대체됩니다. 인류는 문자 발명으로 지식과 문명을 얻은 반면 자신의 감각을 DNA 깊은 곳에 묻어버렸습니다. 두 다리를 얻은 대신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의 운명 같은 거죠. 느낌, ‘촉기’와 같은 느낌들은 점점 추방당하고 문자와 그 종족들이 어느새 인류의 뇌를 점령하는 겁니다. 피작은 최전선 선봉장의 고향이자 점령지 주둔군 본부입니다. 세계 문자 박물관이 있으니까요.

중세 시대의 피작은 남프랑스 제일의 상업도시였습니다. 오랜 전쟁과 전염병이 창궐하자 도시는 침체되었고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연간 방문객 20만 명이 넘는 ‘예술과 역사의 도시’로 재탄생합니다. 인구 1만도 채 안 되는 작은 도시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데에는 여기가 걸출한 문자 연구가의 고향이기 때문이죠.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이집트 로제타스톤에 적힌 파라오의 이름들을 모두 해독하여 상형문자의 비밀을 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학자입니다.


1980년대에 들면서 피작시는 샹폴리옹이라는 문화영웅을 활용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생가를 복원하여 박물관으로 만들고 거기 고급하고 정교한 콘텐츠를 구축합니다. 세계의 문자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보여주고 학습시키기도 하는 전시와 교육의 모델을 창안한 거죠. 지금은 전 세계에서 문자 연구자들이 몰려드는 ‘문자 도시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샹폴리옹 박물관은 기능상으로 샹폴리옹 세계 문자 박물관이며, 인류 문명의 역사를 ‘문자사(文字史)’로 풀어내는 특이한 콘텐츠 회사입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5] 샹폴리옹 박물관에서

제가 한국 사람인 걸 알고 박물관 학예사는 위대한 ‘킹 세종’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자를 창안한 군주. 역사상 전무후무하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한글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이내 실망했습니다. 아시아 문자로는 일본의 히라가나와 중국의 한자만 소개되는 정도. 공연히 심드렁해집니다. 촉기를 몸에 붙이고 다니다가 박물관 안에 들어와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판에 음각을 한 한시 한 수가 문득 눈에 박힙니다. ‘창전명월광 의시지상상 거두망명월 저두사고향’ 당나라 시인 이백의 <깊은 밤 고향 생각[靜夜思]>이네요. 하늘의 달빛과 지상의 서리가 하나입니다. 여기 보이는 달과 멀리 보이지 않는 고향도 하나네요. 문자속도 이만하면 심미적 철학일 텐데, 그래도 저는 나무마다 새로 돋는 연초록 잎사귀가 어느 예술작품보다 경이롭다는 걸 유럽의 들판을 걸으며 생각하며 느낍니다. 햇살이…, 바람이…, 강물이…, 제 몸에 살아 있는 영원한 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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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안마당에 복제 로제타스톤이 실물 크기로 깔려 있습니다. 꽤 큽니다. 돌로 된 고래가 울다 지쳐 잠들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대 길 위의 나그네여! 고래돌에 새겨진 문자만 보려 말고 거기 얼비치는 별빛이나 촉기도 당신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윤재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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