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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善과 惡 대결? 이기려고 뛰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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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리 vs 매켄로'

[이종길의 영화읽기]善과 惡 대결? 이기려고 뛰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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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아이스' 냉정함 잃지 않는 보리 vs '코트의 망나니' 괴팍한 성질의 매켄로
극과 극 플레이어의 우정과 갈등 그려...힘과 자제력의 조화·자기 성찰 과정 세밀하게 묘사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1980년 윔블던테니스대회 남자단식 결승 티켓을 따낸 비외른 보리(스베리르 구드나손). 얼굴에서 웃음기는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불안과 초조에 신경이 지지리 졸아붙은 듯하다. 기자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결승에서 맞붙을 수 있는 존 매켄로(샤이아 라보프)의 코멘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리는 곧 고장이 날 기계 같은 선수다.'" "저도 다른 선수들과 같아요. 기계가 아닙니다."


뒤이어 결승에 오른 매켄로도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그는 가슴을 옥죄어 드는 불쾌한 흥분을 그대로 드러낸다. "결승에서 누가 당신을 응원할까요?" "솔직히 여러분은 보리를 영웅으로 만들 악인이 필요하잖아요." "성질을 죽일 수 있겠어요?" "테니스는 개뿔도 모르면서! 코트에서 싸울 때 난 모든 걸 던져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있어요? 안 해봤으니 알 리가 없지."

영화 '보리 vs 매켄로'는 매켄로의 냉소적인 되물음에 보리의 얼굴을 가리킨다. 소나기처럼 뿜어 내리는 물 앞에서 몸을 씻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다. 고개를 숙인 채 벽에 기대어 괴로워하는데, 이내 왼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숙명이다. 그도 매켄로처럼 심판 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때가 있었다. 레나트 베렐린 코치(스텔란 스카스가드)를 만나 온갖 감정을 꿀꺽 삼키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래서 '미스터 아이스'라는 별명이 생겼다. 투지나 근성을 얼굴에 드러내는 법이 없다. 승부 근성이 부글부글 끓어올라도 발과 숨소리로만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보리는 이 루틴(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명령)이 깨지면 경기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善과 惡 대결? 이기려고 뛰었을 뿐...



매켄로 역시 외롭기는 마찬가지.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올라운드 플레이어지만, 과격한 성질을 이기지 못해 범실을 자주 저지른다. 심판이나 관중에게 폭언을 퍼붓다 벌금도 자주 문다. 그래서 '테니스의 악동', '코트의 망나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준준결승에서 그에게 패한 친구 피터 플레밍(스콧 아서)은 진지하게 조언한다. "넌 윔블던에서 우승하게 될 거야. 올해가 아니더라도 곧 될 거라고. 그런데 넌 최고로 기억되진 않을 거야. 왠지 알아? 아무도 널 안 좋아하거든. 커서 매켄로처럼 되고 싶다는 애는 없다고. 20년 후 세상은 이렇게 떠들겠지. '심판마다 들이받은 또라이 자식이 누구였더라?'"


야누스 메츠 감독은 1980년 윔블던테니스대회 남자단식 결승을 펼치면서 두 선수의 고충과 심리에 주목한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은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그 치열함에 있어서는 서로 매우 닮았다고 본다. 감정적 혼란을 부각하기 위해 박진감 대신 리얼리즘에 주안점을 두고 핸드헬드 기법으로 당시를 재현한다. 그는 "당시 경기에서 한 선수는 웃긴 헤어스타일을 하고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편 선수는 심하게 오버하면서 떼를 쓰는 듯했다"면서도 "그들의 경기에서 성스러운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두 선수의 경쟁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善과 惡 대결? 이기려고 뛰었을 뿐...



당시 보리는 매켄로의 열화와 같은 맹추격을 뿌리치고 사상 첫 5연패를 달성했다. 물고 물리는 3시간53분의 풀세트 접전 끝에 3-2(1-6, 7-5, 6-3, 6-7, 8-6)로 승리하고 대회 35연승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경기 뒤 보리는 땅에 꿇어앉아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생애 최고의 경기였다"고 했다. "4세트에서 매치포인트 일곱 번을 모두 날려 먹었을 때 지는 줄 알았다. 5세트에서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기분으로 임했다. 내가 경험한 가장 멋진 경기였다. 내년에도 출전해 6연패에 도전하겠다."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결승에 올랐으나 3시간26분의 접전 끝에 매켄로에게 1-3(6-4, 6-7, 6-7, 4-6)으로 역전패했다. 평소 좋지 않은 경기 자세로 구설수에 오르던 매켄로가 의외로 냉정하고 안정된 플레이를 보였다. 폭발적인 서브를 바탕으로 깊고 짧은 스크로크와 결정적인 발리를 배합한 완숙한 변화 플레이를 구사했다. 그는 "경기 내내 성질을 죽이느라 애썼다"고 했다.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켄로는 강한 상대와 가차 없이 벌금을 때리는 심판, 편파적인 응원을 하는 관람객을 모두 적으로 돌려야하는 고군분투의 악조건을 넘어섰다. 그의 아버지이자 매니저로 활동한 매켄로 시니어는 "평범한 선수 같으면 이미 준결승에서 탈락했거나 결승에서 의기소침해 패배했을 것이다. 매켄로는 이를 극복하고 적들에 대한 불만의 에너지를 공과 라켓에 폭발시켰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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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善과 惡 대결? 이기려고 뛰었을 뿐...



테니스에서 힘과 자제력의 조화는 절대적 요건이다. 매켄로는 확률이 높은 서비스를 바탕으로 네트플레이를 구사한다. 백스윙이 좋아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에 능하다. 보리는 베이스라인에서 지칠 줄 모르게 받아넘기는 톱 스핀(공을 라켓으로 밀어 올리듯이 치는 타법)의 자제력이 출중하다. 1981년 윔블던테니스대회 남자단식 결승은 전년과 달리 힘이 자제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막강한 힘도 자제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매켄로는 그 필요성을 1년 전 윔블던에서 보리에게서 배운 듯하다. 영화 속 마지막 악수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축하해." "고마워." "멋진 경기였어." "네가 이기는 줄 알았어." "그럴 뻔했지. 내년은 모르는 거야." 매켄로를 떠나보내는 보리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해맑다. 그 역시 매켄로에게서 큰 소득을 얻었을 것이다. 자신과 닮은 선수와 경기하면서 이룬 자기 성찰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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