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기준, 심사위원 비공개에 두루뭉술한 탈락 사유…국가보훈처 '깜깜이' 행정에 희미해진 독립의 발자국들
[아시아경제 유병돈 기자, 이승진 기자] # 제주에 사는 임정범(63)씨는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을 탈출, 항일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알리젼 고(故) 임도현 선생의 조카다.
임 선생은 항일운동이 한창이던 1931년 12월 동료 6명과 함께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와서는 일제의 공출과 징병에 대한 거부 운동을 벌이다 고문을 받고, 4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이 같은 내용을 알게 된 조카 임정범씨가 지난 2004년부터 백방으로 뛰며 임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심사를 8차례나 신청했지만, 결과는 매번 탈락이었다. 임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은 기록문건이 전부라 이를 뒷받침할 공신력 있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지정 절차가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내년이면 3·1 운동 100주년을 맞게 되지만,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펼치고도 수감기록 등 증빙자료가 부족하거나 소속 단체의 성격 등을 이유로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즐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4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보훈처는 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 사실이 있어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에 한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나눠 독립유공자를 지정한다. 서훈 사실이 없을 경우에는 후손이 공적서와 평생이력서를 구비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면 국가보훈처는 제출 서류를 바탕으로 공적심사위원회 심의를 통해 포상 부여 여부가 결정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 여부를 인정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국가보훈처가 밝힌 독립유공자 포상기준은 ▲독립운동 참여정도 ▲당시의 지위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독립운동의 공헌과 희생정도 등이다.
모든 항목이 추상적인 기준들인 탓에 심의에 참여하는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 제5호(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할 만한 정보)를 근거로 심사위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심사기준도, 심사위원도 모두 꽁꽁 숨긴 채 ‘깜깜이 심사’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지정 시스템은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 통보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지적된다. 서훈에서 탈락한 경우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 등 구체적인 사유 없이 애매모호한 답변으로만 일관하고 있어서다.
3.1만세운동
더욱이 국가보훈처는 심사 과정에서 필요한 일제 치하 재판기록 등 일반인들이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후손들에게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국내에서 소실·유실된 문서가 많아 일반인이 해당 자료들을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독립운동 포상기준 자체도 진입장벽이 높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활동 내역이 6개월 이상 확인되고, 수형(옥고) 기간이 3개월 이상 되는 자에 한해 기간 별로 차등을 둬 포상을 실시하고 있다. 활동 기간과 수형 기간이 8년 이상일 경우 대한민국장(1등급)·대통령장(2등급)·독립장(3등급)을, 5년 이상 활동 및 4년 이상 수형에 대해서는 애국장(4등급)을 수여하는 식이다. 수형 기간이 2개월이면 가장 낮은 수준의 포상인 ‘대통령 포상(7등급)’에서조차 제외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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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국가보훈처는 향후 포상 기준이 바뀌거나 추가 자료가 발굴될 경우를 감안, 독립운동 여부가 인정되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도 ‘기각’이 아닌 ‘보류’ 처분을 내리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을 두고 후손들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반발한다.
임정범씨는 “정부가 나서서 사료 발굴에 나서지 않는 이상 ‘보류’와 ‘기각’은 같은 말이라고 본다”면서 “명확하고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기준을 세워야 후손들도 결과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병돈 기자 tamond@asiae.co.kr
이승진 기자 promoti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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