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 문제원 기자] 592억원을 뇌물로 받거나 받기로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지난 3월31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지 53일 만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번째로, 21년 만에 형사법정에 서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서관 417호 대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등 혐의 첫 정식 공판을 열었다.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도 1996년 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수의가 아닌 남색 정장 차림으로 수인번호(503) 배지를 단 채 재판장의 지시에 따라 입정했다. 평소의 올림머리는 아니지만 비슷한 형태로 단장을 한 모습이었다. 구치소에서 구입 가능한 집게핀이 눈에 띄었다. 박 전 대통령은 공범관계이자 40년지기인 '비선실세' 최순실씨를 법정에서 대면했다.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뒤 두 사람이 대면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씨는 베이지색 재킷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찬 채로 법정에 나타났다. 둘 모두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최씨는 입정하면서 먼저 입정한 박 전 대통령 쪽을 한 차례 바라봤다. 이후로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에 가만히 앉아 정면만 응시했다.
최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정면을 바라보고 고개를 떨구기를 반복했다. 박 전 대통령은 변호인을 사이에 두고 최씨와 나란히 앉았다. 박 전 대통령 측에 뇌물 70억원을 건넨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이들과 함께 피고인석 끄트머리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적사항 등을 확인하는 인정신문 과정에서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무직입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이어 주소지를 확인한 뒤 자리에 앉았다. 최씨는 같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작게 울먹이며 목소리를 떨었다.
잠시 뒤 재판장이 '혹시 국민참여재판을 원하느냐'고 절차에 따라 묻자 박 전 대통령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신 회장 모두 혐의를 부인하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앞으로 수 개월 동안 증거조사와 증인신문 등을 거쳐 유무죄 및 양형 판단을 내린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37분께 교도관들과 함께 법무부 호송버스를 타고 구치소 정문을 빠져나왔다. 청와대 측의 경호는 없었고, 최소한의 관리를 위해 경찰 사이드카가 앞뒤로 한 대씩 따라붙었을 뿐 이동 중에 교통이 통제되지도 않았다. 취재차량들이 따라붙어 박 전 대통령이 탄 차임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인덕원역과 우면산터널 등을 거쳐 9시10분께 법원에 도착했다. 서울구치소 출정과장이 버스에서 내리는 박 전 대통령을 예우 차원에서 맞이했다. 박 전 대통령은 법정에 들어서기 전까지 수갑을 차고 있었다. 여성재소자는 호송 중에 포승을 하지 않고 수갑만 차도록 하는 게 보통이다. 법정에서는 포승이나 수갑을 풀어줘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 대기장소에 비공개로 머물다가 입정했다. 법정 출입구 주변은 공판 시작 약 한시간 전부터 미리 방청권을 확보한 시민 수십명과 취재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배치된 경찰 등으로 북적였다.
서울중앙지법 근처 '법원삼거리'에는 박 전 대통령 지지자 약 150명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은 무죄다 당장 석방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손팻말,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했다. 법원은 사안의 중대성과 국민의 관심 등을 고려해 공판 시작 뒤 2~3분간 언론의 법정 촬영을 허가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지난 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의 298억원(약속액 433억원) 뇌물수수 및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의 70억원 뇌물수수 등 모두 592억원의 뇌물수수ㆍ요구ㆍ약속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대한 기업 강제모금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 ▲현대자동차에 대한 '최순실 지인 회사' 남품 강요 공모 등 18개 범죄혐의로 박 전 대통령을 구속기소했다.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문제원 기자 nest263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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