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심나영 기자]부산 용호동에는 일대에서 유명한 부촌 아파트가 있다. 중ㆍ대형 평수가 많고 학군이 좋은 편이라 부산 시민들이 선호한다. 이 아파트가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또 있다. 아파트 터 때문이다. 아파트를 세우기 전인 2000년까지만 해도 동국제강 부산 제강소가 이 자리의 주인이었다. 동국제강이 바다를 매립해서 만들었던 제강소에는 전기로가 4개 있었다.
철광석과 유연탄을 넣는 용광로와 달리 전기로는 고철을 투입한다. 그러나 쇳물을 뽑아내는 고로라는 점은 같다. 2004년 아파트 입주 당시 "전기로가 있던 자리에 올라간 동에 입주하면 부자가 된다"는 설(說)이 퍼졌다. "그 동의 집값이 다른 곳보다 훨씬 비싸다"는 말도 돌았다. 지난달 부산 출장길에 우연히 들었던 이 이야기의 실체를 확인해보려 아파트 관할 부동산에 전화해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집 값 올릴라꼬 서로 자기 아파트에 용광로가 있었다고 그러지예."
고로와 관련된 이런 세간의 믿음은 철은 부의 상징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국내 대표 철강기업들의 창업정신인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맞닿아 있다.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철이 필수"라는 생각을 갖고 추진했던 국가 프로젝트였다.
특정 지역, 특정 시간에만 한해 철의 중요성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에서도 역사적 사례가 나온다. 168명의 오합지졸을 이끌었던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8만 대군을 거느린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철이었다. 1532년 스페인 군사들은 칼과 갑옷, 총으로 아타우알파를 무릎 꿇게 했다. 그들의 무기는 2017년 현재 시점에서 철강사들이 생산하는 제품에 비유된다.
최근 포스코의 TV 광고에는 '기가스틸로 철의 새 시대를 열어갑니다'란 문구와 함께 그것으로 만든 자동차가 등장했다. 포스코가 2000년 이후 기업 이미지 광고 이외에 기술력이 집약된 제품 광고를 하는 것은 처음이다. 역설적인 건 하이테크(High tech) 선두주자인 철강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미신 성격이 짙은 '의식'을 치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달 전 포항제철소 3고로 개ㆍ보수 현장에 간 적이 있다. 고로 안에 쌓는 내화벽돌에 '최고(最高)', '강건(强健)', '초석(礎石)' 등 18개 휘호가 새겨져 있었다. 고로 개ㆍ보수를 총괄하는 임원에게 벽돌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니 "성공적인 공사 수행과 안정조업을 기원하기 위해 연 '연와 정초식' 행사를 기념한 것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의식"이라고 소개했다.
조강생산량 기준 지난해 포스코는 세계 5위, 현대제철은 13위 제철소로 이름을 올렸다. 이 자리에 올라간 건 기술력 덕분이다. 포스코의 기가스틸, 현대제철의 내진용 H형강, 동국제강의 컬러강판은 외국 철강사들도 못 따라올 경쟁력을 갖췄다. 국내 철강사들이 '월드 프리미엄 플러스(WP+)' '하이 밸류(High Value)' 와 같은 마케팅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올들어 4월까지 대중국 철강 수출 물량은 지난해보다 5.5%가 늘었다. 중국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문제로 유통 분야의 피해가 막심했던 때, 국내 철강사들이 상대적으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기술력 덕분이었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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