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도 경쟁력이 되는 세상에서 아픈 상태에 놓인 사람은 질병 자체의 고통 더하기, '무능력'의 낙인과 싸워야 한다. 자본주의의 절대교리인 '자기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삐딱한 이유는 물론 몸이 아프기 때문이고. 며칠 새 고열에 시달리다 아이큐가 10쯤 낮아진 기분이다.
질병이 고약한 건, 가진 거 하나 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이 육신만큼은 전적으로 나의 소유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실존적 고독을 느끼게 해서다. 열이 펄펄 끓었다? '끓었다'는 말이 무슨 고통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늘이 노래졌다? 역시 정확하지 않다. 열이 심해지면 최근의 맥락과 무관한 기억이 섬광처럼 소환될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네 살 때 계단에서 떨어뜨려 깨져버렸던 플라스틱 호박마차의 바퀴 디테일이 한밤중에 불현듯 떠올랐다. 이건 진짜긴 하지만, 언어로 옮기는 사이 어쨌든 모든 고통은 고립된다.
그렇다고 언어를 포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정말 아프냐'는 의혹에 대응해야 한다. 병자랑만큼 듣기 싫은 게 없다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노인과 함께 살아봐서 안다. 하지만 꾀병이나 엄살로 오인되는 것보다야 병력을 나열함으로써 '흠결은 있으나 구라는 안 치는' 사람이 되는 게 낫다. 평판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래야만 이 공고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의 일부의 역할의 일부가 작동하는 데 잠시 착오가 일어남을 양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기상 직후 최저혈압이 50이라서, 제가 간밤 최고 체온이 38.5라서, 제가 분기에 한 번 편도선염에 걸리며 국민메뉴 치킨을 먹으면 열에 다섯 번은 체하는 채로 30년을 살아와서. 이런 말을 늘어놓는 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에는, 타고난 에너지의 효율이 좋지 않아서 9 to 6의 근무가 끝나면 집에 와서 곧장 눕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심지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다든지 하는 일들이 과로가 되는 사람. 그러나 또, 허약하다고 낭만을 모르겠는가. 상대적으로 몸이 가볍다 싶은 날에 소박하게 과로를 도모하기도 한다. 물론 그때 손실된 에너지를 벌충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말로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죄책감과 억울함이 공존한다. 자주 아픈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며 아픈 당사자야말로 그걸 너무 잘 안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강박의 근육이 이들에겐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양 이런 긴장 속에 사는 자체가 분하다. 누구보다 안 아프고 싶은 사람은 나인데. 아프니까 노력한다. 어느 한 군데가 고장 나면 열과 성을 다해 회복시킨다. 그런데 기껏 고쳐놨더니 곧바로 다른 데가 고장 나면 만사가 미운 것이다. 얼마든지 미운 것이다.
그러니 몸이 자주 아픈 이에게 왜 그렇게 자주 아프냐고 묻지 말아달라. 나도 모른다. 헬스를 해봐, 브로콜리를 먹어봐, 외식을 하지 마, 커피를 끊어 봐. 모두 선의라는 것을 안다. 그들이 나의 '역할'이 아니라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아프지 말라는 말보다 때로는 아파도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좀 아프면 어때, 쉬면 나아질 거야. 사람이 아플 수도 있지, 어떻게 맨날 건강해. 이런 심플한 말이, 아픈 사람에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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