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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어디부터가 오지랖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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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어디부터가 오지랖인가 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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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플랫폼에서 아들의 소변을 받고 있는 중년 여자를 본 적이 있다. 여자가 허리를 굽힌 채 두 손으로 꽉 잡은 1.5리터 페트병 속으로, 아들의 굵은 소변줄기가 흘러드는 중이었다. 체격으로 미루어볼 때 거의 다 자란, 학교에 다닌다면 고등학생쯤 되었을 성싶은 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높낮이 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바지를 내린 남자의 뒷모습을 먼저 보고 일단 다리가 휘청거렸기 때문에, 정황을 알고 지나친 뒤에도 놀란 가슴이 한참 뛰었다.


마음을 할퀸 것은, 공중(公衆)에 드러난 성인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 여자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짐이었다. 소지품이 쏟아져 나온 가방, 구겨진 쇼핑백, 무언가를 동여맨 보자기 꾸러미. ‘보호자’로 아주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짐작한 일이면서도 다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손놀림이 역력히 남은 짐들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역사였다.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아니면 그들이 불편해서 몇몇 사람은 자리를 피해 걸었고 나도 멀찌감치 떨어져갔다. 쳐다보거나 당황한 표정을 지어 그들에게 무례가 되는 일이 없도록 고작 긴장하면서.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지만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고민한다. 여자가 아들을 돌보는 동안 내가 흩어진 짐들을 일으켜 챙겨줬다면 그것은 무례였을까. 여자는 페트병을 비우러 화장실부터 가야 했을지 모른다. 급히 놓아버린 짐들을 거두어 들고 아들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가, 플랫폼으로 다시 돌아온 뒤 다음 열차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화장실에 다녀올 때까지 짐을 잠깐 봐줄 사람이 있었다면 혹시 도움이 되었을까.


하지만 누구의 접근도 부담스럽고 귀찮은 상황은 아니었을까. 이미 스스로 주변에 폐가 되고 있다고 판단해버려서 그냥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날처럼, 아무도 그들이 거기 있지 않은 듯 지나쳐주는 것이 여자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의 상태가 낯선 사람이 접근했을 때 어떤 자극을 받아 주변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유형이었다면 더욱,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 된다. 뭐가 도움이고 뭐가 ‘오지랖’이었을까. 곤란한 상황에 처한 타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 타인이 ‘바라지 않는’것인가. 이런 것을 몇 년간 고민하는 건 무지해서인가 소심해서인가.

이러한 무지(또는 소심) 덕에 사회성 부족을 지적당할 때가 있다. 정(情)이 없다는 힐난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반박하기는 어렵다. 정이라는 둘레 안에서 타인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무엇보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나는 잘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억울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항변하고 싶다. 타인이 바라지 않는 것을 헤아리는 능력도 사회성이지 않습니까. 타인이 바라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어디부터가 오지랖인지 고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남의 일과 나의 일 자체를 분별하는 일, 남의 일에 대한 나의 개입이 조력이 될지 폭력이 될지를 분별하는 일이 어쩌면 ‘선의’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그래도 이 정도 분별은 나도 어렵지 않다. 유부남인 영화감독과 싱글인 여배우가 사랑을 하든 도망을 하든 영화를 찍든 그것은 남의 일, 그 둘 모두의 팬인 내가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것은 오롯한 나의 일.


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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