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저도 삼계탕 좋아하는데…’삼계탕도 아닌 닭도리탕을 해 먹는데 불현듯귓전에 돋아난 음성. 별 친분도 없던 20대 초반의 청년. 여럿이 함께한 한번의 식사와, 수업 사이 마주침에 호응했던 짤막한 인사.
여행을 위해 탐색한 곳의 체류를 늘리고 목적을 어학연수로 변경했었다. 애써 가라앉히던 생존강박이 잠시 수면 위로 나왔던 것이다. 깊은 고민 없이 선택한 어학원에는 나와는 이십 년 가까운 터울의 타국과 한국 청년들로 그득했다.
오래 앓아 온 내 지병 중엔 ‘상상공감’이란 게 있다.깊이 사정을 알지 못함에도 저간의 상황과 상상으로 입장을 가늠해보다 덜컥, 때로 지나치게, 공감을 품게 되는.그러니까, 타국의 어학원에서 다양한 타국 청년들 사이 반짝이던 한국 청년들에게도 그랬던 것이다. 그 명민함들이 뿌듯했고 밝음이 부러웠고 고민들이보여 안쓰러웠고 너무나 건실함에 착잡했다. 한창 무모할 수 있는, 무모해야 할 20대가 아닌가. 타국의 또래들은 저토록 마음껏 무모하고 스스럼없이 무례한데, 이런 규수들과 샌님들이라니. 그다지 다르지 못했던 내 20대가 겹쳐져 괜히 더 안타까웠을 게다.
‘안녕하세요. 언니~”, “안녕하세요. 누나~”. 세상에 공짜 없다를 몸소 마음소 겪어온 나로선 그들의 깍듯한 무상(無償) 예의에 나보다 힘든 이의 것을얻어쓰는 듯 겸연쩍었다. 빚이 이래저래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당시 나름의 빚 갚음 방식은 음식을 해서 나눠 먹는 것이었다. 아직은 요리가 익숙치 않을 나이에 타국에서 스스로 매 끼니를 해결한다는 게 쉬울 리가 있나. 내 것을 만들 때 양을 더해 같은 숙소에 머무는 어린 친구들과 나눠먹곤 했다. 기회를 만들어 여럿 초대해 파티를 열기도 했다. 타국 친구들을 부르기도 했지만, 한국 친구들이 우선이었다.
친한 녀석들의 배고프단 말에 흔들려, 혼자 몸보신할요량으로 한국서 가져간 백숙용 약재를 죄 털어넣어, 삼계탕 파티를 연 적이 있다. 다음날, 어학원에서 마주친 H가 다짜고짜 서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누나 저도 삼계탕 좋아하는데…”, “아 미안, 다음엔 초대할께.” 덜컥 미안했다가, 이내 볼멘 심상이 생겨났다. ‘어떻게 수십 명을 다 불러?’
“다음엔 초대할께”란 의례적인 말은 ‘닭도리탕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분해 마지막까지 은근 압박이었다. 유례 없이 푹푹 찌던 긴 여름은 그곳도 마찬가지였고 에어컨도 없이 오래 불을 쓰고 파티를 한다는 게 도저히 말이 안 돼 냉국수나 만들어 몇몇과 식사만 몇 번 하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일주일 후, 페이스북에 연결된 친구를 통해 H의 포스팅이 떠올랐다. 그가 아닌 그의 누나가 올린 것이었다. ‘2016년 9월 00일. 너무 예쁘고 의젓하고 착한 OO이가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횡경막께가 잠시 일렁였다.
‘아까워라…’.무엇이 아까운지 분명치 않은 채 머리와 입안을 맴 돌았다 .H의 페이스북 담벼락엔 애통함이 담긴 친구들의 애도글 아래, 불과 얼마 전 그가 포스팅한, 청년답게 개구진 글들과 여행지의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생생한 눈빛으로 화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움을 영사할 기억 하나 없고 비통할 수 있는 친분도 관계도 아닌, 그저 ‘아는 청년’의 비보였다.
명절은 신정에 이미 지냈으니, 설 연휴기간 먹거리를 위해 장만 미리 봐 뒀었다. 연휴 중에 냉장고속 재료를 꺼내 닭도리탕을 만드는데 불쑥 H가 떠올랐다. 우연인지 어떤 무의식이 작용했던지, 그 9월 이후 삼계탕도 닭도리탕도 해 먹지 않던 중이고 그날이 처음이었다.
손질한 닭과 양념을 냄비에 넣어 불 위에 올리고 불 조절을 위해 그 앞에 섰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유리 너머에 까닭 흐린 ‘아까움’이 보글거렸다.
김소애, 한량과 낭인 사이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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