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이 거울을 들여다 보며 물음을 하고 거울이 대답을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속 거울문답이다. 흔히 ‘여성의 다른 여성을 향한 질투와 불안’의 상징으로 치부되는데, 이번엔 좀 다르게 들여다보자. 여왕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물었다. 대답은 ‘거울의 목소리’가 한다. 자, 이제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거울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거의 예외 없이, 묵직한 음성의 남성을 떠올릴 것이다. 여성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여성들을 비교하는 목소리의 타자성이 우리에겐 여전히 자연스럽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조차 타인이 평가하는 삶은 얼마나 피곤한 것인가.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삶은 분명 폭력적 환경에 있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거울 속 나를 볼 때조차 타인의 취향과 안목에 크게 영향 받아야 하는 건 분명 자존을 방해한다.
객관적 미의 기준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취향을 단단히 지닌 존재는 그 자체로 빛날 수 있음을 영화 ‘Me Before You’를 통해서도 감흥하게 된다. 우스꽝스럽다는 타인의 평에도 자신의 패션감각을 결코 굽히지 않는 ‘루이자’는 영화가 흐를수록 더욱 반짝이는 존재가 돼 보이며, 불의의 사고로 자존을 완전히 상실한 ‘윌’의 자존을 찾는 마지막 여정에 빛이 되어 준다.
외양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거울문답에는 ‘질문하는 목소리’와 ‘대답하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질문하는 목소리가 다양하다는 건 자신을 다양한 각도와 깊이로 들여다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호기심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외부의 자극에 열린 자세로, 독서와 여행 등으로 견문을 넓히고 타인과 꾸준히 교류하는 셈이다. 이런 다양한 자극들이 나와 나 자신을 매개하는 거울을 끊임없이 연마하고 단련시킨다. 중요한 건,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을 때에야 연마된 거울이 ‘반추와 사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울의 반추와 사유에 자신이 생길수록, ‘대답하는 목소리’는 점점 내 것에 가까워진다.
만약 대답하는 목소리와 질문하는 목소리 모두 자신으로만 한정되면, 독선과 오만 혹은 자폐의 굴레에 걸려들게 된다. 또한, 대답하는 거울의 목소리가 연신 타인의 것이라면, 타인의 취향에 맞추는 시늉을 하고 타인의 흉내를 내다 결국 내 삶이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살면서 자신의 내면을 향한 문답을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과는 상대를 안 하는 게 상책이다. 그런 이와는 애초부터 교감이 불가할 것이다. 교감이 가능하고 깊이 교감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내 거울과 그의 거울을 번갈아 함께 보자. 거울 속 눈을 서로 응시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주고받자. 내 거울이 그의 것에 비해 오목하거나 볼록할 수도 있고, 어느 특정 부분이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다. 상대로 하여금 내가 바라보는 나를 보게 해주는 것, 상대가 바라보는 그를 내가 봐주는 것. 그것이 공감을 이루고 역지사지를 가능케 한다. 서로 이런 노력을 다하다 어찌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중단한 교감(이별)이라면 상호가 미련에 허덕일 여지도 없다. 미련이란 대체로 자신에 대한 후회나 상대에 대한 원망의 사생아이지 않은가. 그게 상처로 남는 것이고.
보이고 싶은 모습뿐 아니라, 내가 아는 나를 드러내고 상대가 자신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 때, 교감의 건강한 싹이 움트고 온전히 자라게 된다. 내가 상대의 훌륭한 거울이 되고 상대가 나의 훌륭한 거울이 되어주는 것처럼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관계는 더 없을 것이다.
솔직하자면, 내면의 거울이나 이상적 교감 등의 어려운 수준은 미뤄두더라도 내 외양을 비추는 거울의 목소리라도 온전한 내 육성이기를, 새해 들어 바래본다. ‘이상’의 시, ‘거울’의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 이상의 시 ‘거울’ 중 >
김소애 한량과 낭인 사이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