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숨기고 싶은 모습은 미처 떠나지 못한 자신이다. 보이고 싶은 모습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신이다. 가면(숨김)도 노출(드러냄)도그 사람의 본질일 수 있다. 가면이 노출일 수 있고 노출이 가면일 수 있다. 가면도 노출도 쉽게 비난해선 안 된다. 자신을 인식도 자각도 못한 채, 어느 자신을 떠나 어디를 향할지 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훌륭하지 않은가.
노출로 자신을 완벽히 가렸던 마릴린 먼로가 있고, 가면으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낸 레이디 가가가 있다. 가수나 배우처럼 우리도 사랑받기 위해 가면을 쓰고 노출을 감행한다(여기서 가면과 노출은 신체적/심리적 측면, 둘 다를 의미한다). 가면(혹은 노출)이 비난받고 때로 법적 처벌의 대상까지 되는 것은, 그 불순함 때문이다. 가면으로 타인들을 속여 무언가 갈취하고 자신의 이득을 맹렬히 의도한다면 그것은 ‘사기행각’이 된다. 사랑받기를 포기한 자의 불순한 가면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히는 데 활용되곤 한다.
우리는 수년 전, ‘유능한 CEO’의 가면을 한 대통령을 선출했고, 그로 인해, 국토와 경제, 정치, 국민정서에까지 광범위한 피해와 손실을 감당해 오게 되었다. 이어서 대통령이 된 이는 자기 아버지의 오래된 성(城)에서 어설피 복제된 성 안에서만 머물렀다. 자신의 본질을 인식도 자각도 못하는 자는 권위의 성 안에서 아리따운 공주 역할에 치중했다. 두텁고 높은 성벽은 국민과의 소통을 차단한 채, 자격 없는 극소수 측근의 불법 수렴청정과 밀실 국정 농단을 가능케 했다.
역사에서 권력자들은 하늘같이 높은 성에 올라 앉아 위계의 격차를 부풀려 권력의 안위를 다지고 백성 위를 군림했다. 과도기 근대를 거쳐 현대 민주주의로 오면서, 성벽은 높이가 낮아지고 권력자들의 권위의 허풍이 점차 줄어들었다. ‘권력자’가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식민에 이어 내전과 분단을 겪으며, 일제의 잔재는 물론, 중세적 세계관조차 털어내지 못한 나라에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세습이 자연스럽고, 권력자의 허상과 억지 권위가 여전히 큰 효과를 발휘해 왔다. 오히려, 가면 없이 스스로 성벽을 부수고 국민을 공감하고 국민에게 사랑받고자 한 대통령은 만만한 존재로 해석돼 ‘껌’처럼 취급되었다.
여전히, 지도자는 잘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권력자들만 즐비하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법 권력자들까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남다른 환경 혹은 재능을 추앙받느라 타인과의 수평적 교감 경험이 부족하거나, 누군가의 재능이나 부와 권력을 심히 추종하던 부러움이 탐욕화되었거나, 정서적 안정감의 결핍 탓에 위계 차이의 안정감에 안착하려는 이들. 이들은 권위의 성벽 안쪽에서 위계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부와 권력을 무기로 흔든다. 자신들이 설정한 ‘아랫것들’이 감히 도발치 못하도록, 설사 도발터라도 쉽게 응징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아랫것들’에 대한 공감은 불필요한 소모이고 위선과 가식으로 쉬 치부된다.
뇌신경심리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저서 '승자의 뇌'에서 권력형 인간이 권력을 쥐면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더욱 활성화돼 화학적 도취 상태가 되고 한층 더 강한 권력을 탐하게 된다고 말한다. 권위의 성을 나와 위계의 갑옷을 벗는 일은 도취에서 깨고 자존감의 유약한 속살이그대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권력에 오래 도취된 이들은 결코 스스로 성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면’과 ‘성벽’에 연이어 휘둘리며 답답한시국을 맞게 된 것은, 허상을 추종하고 권위에 굴종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질문과 비판의식, 호기심마저 거세하는 교육 탓이 적지않다.
우리는 저절로 시간과 동행해 나아가지만, 그 나아감은 어떤 쪽으로든 힘을 가해야 다른 차원의 방향성이 생긴다. 다양한 사람들의 지양(止揚)과 지향(志向)들로 합성된 벡터가 시대의 변화 방향을 이끈다. 호기심과 예민함의 비늘을 반짝이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구하는 노력이 다수의 일상이 되어야, 오랜 틀을 부수고 성숙한 삶과 사회의 다음 스테이지(stage)로 입장할 수 있다.
김소애 한량과 낭인 사이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