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리콘밸리의 신화'(1999) 막바지 장면이다. MS가 애플의 협력사로 있던 중 맥킨토시를 모방해 Windows를 개발한 사실을 알게 된 스티브잡스가 빌 게이츠를 맹비난한다. 그때 빌 게이츠의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에겐 부유한 이웃(제록스)이 있고, 우리 둘 다 그 집의 도둑인 거야. 네가 화내는 건 내가 잘 훔쳐냈기 때문이고!” 빌 게이츠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다. 제록스의 GUI를 도용해 맥킨토시를 개발한 스티브잡스는 이내 누그러져 숨을 고르고, “그래도 우리 께 너네 꺼보다 나아”라며 빌 게이츠 앞에 자존심을 돋워본다. 그에, 강렬한 미소를 두른 빌 게이츠가 일갈한다.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이 장면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잔향으로 남고, 빌 게이츠가 못내 얄미우면서도 그의 당당함에 진한 물음을 새긴다. 약소기업이 대기업의 것을 버젓이 도용하고, 또 그것이 업계와 소비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애플과 MS,모두 무사히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의 정서와는 확연히 다른 무엇인가가 실리콘 밸리, 미국, 더 넓게는 서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의 윤곽은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구약’의 한 에피소드 ‘다윗과 골리앗’에서 찾게 된다. 290cm의 거구에 7kg의 창, 57kg의 갑옷을 지니는 괴력 거인을 상대로 평범한 체구의 양치기 소년이 싸워 이긴 이야기는 흔히 ‘용맹과 지혜’를 강조할 때 인용된다. 그런데, 갑옷도 걸치지 않은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방법은 일반적 격투와 다르다. 다윗은 물리적 거리를 두었고 재빨리 줄에 돌멩이를 감아 거인의 이마를 명중해 쓰러뜨린다. 어찌 보면, 싸움의 규칙에 어긋난다. 정정당당히 육탄전을 치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윗이 비겁 혹은 야비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체급의 차이’ 때문이다. 차이를 ‘극복’하고 이긴 것이기에, 방법이 ‘정규’에 어긋나도 비난받지 않는다. 심지어 ‘용맹과 지혜’로 추앙되고 ‘정의’의 상징이 된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와 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홍길동’과 ‘전우치’가 있다. 그들도 권력과 부의 격차를 둔 힘 있는 자들을 상대로 용맹과 지략을 펼친다. 다름은 이야기의 후반에 있다. 양치기 소년은 거인을 쓰러트려 승장이 되고 왕위까지 얻어 이스라엘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약소민족이자 약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성공 스토리는 서양문명에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 ‘약자’의 도발은 신의 가호가 함께한다.’ 반면, 우리의고전영웅들은 게릴라 활동 후, 섬이나 산속으로 도망치듯 자취를 감추고 만다. 승리도 전복도 이루지 못한 채.
앞서 언급한 영화의 원제는 ‘Pirates of Silicon Valley’다. 직역하면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이다. 한국 정서로는 ‘해적’의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했을 것이다. 우리에겐 조건, 상황, 환경 등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 언제나 ‘바른 규칙’을 지키고 ‘정당하게’ 싸워야 한다는 관념이 강하다. 헌데, 우리의 현실에서 이는 쉽게 오용된다.‘약자’의 ‘강자’에 대한 도발은 불가하고, ‘가난한 자’가 ‘가진 자’의 것을 도용하는 것은 용서 안 되는 사회에서 그 역은 비일비재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겐 ‘무죄추정’이, 가난한 자, 힘 없는 자에겐 ‘유죄추정’이 적용되는 사건들을 우리는 자주 목도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이나 신생 벤처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거대 인프라와 마케팅을 활용해 시장점유에 성공하는 사례를 심심찮게 봐야 한다. 법의 공정성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공감하는 판결들로 상처 입은 지 오래다.
서양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과학혁명을 이룬 후 우리보다 백년 이상 앞서 민주주의를 시작하고 풍요와 복지를 구현해 더 살기 나은 사회를 건설하게 된 배경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관용’의 철학과 그로 인한 ‘계층의 유동성’이 크게 자리한다. 가난한 청년보다 대통령을 더 가엾게 여기는 우리가 거의 잊고 있는 것들, 트럼프가 당선된 지금, 미국도 잊어버린 그것들 말이다.
김소애 한량과 낭인 사이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