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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이불 장사/최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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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시장 이불 장수가 나를 붙잡는다. 이불 한 번 쳐다봤다고 즉시 이불 세 채를 펼친다. 호랑이를, 장미꽃을, 공작새를 수놓은 이불을 펼친다. (중략)


사십 년 이불 장사 베테랑의 수완에 말려들어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많은데 맘에 드는 게 없다니, 가격이 맘에 안 드나요? 이불 장사가 계산기를 두드려 눈앞에 들이민다. 다른 가게도 좀 돌아본 후에요. 그가 눈을 치켜뜨며 이렇게 많이 펼쳐 보고 그냥 가면 어떡해? 미안해요, 간신히 뿌리치고 달아나는데 재빨리 뒤쫓아 와 귓가에 처음 만진 이불을 반값에 주겠단다. (중략) 어느새 둘둘 말아 포장을 한다. 카드를 내미니 현금 내면 10프로 할인해 준다고 한다. 호랑이도 공작새도 장미꽃도 다 가짜라는 거 안다. 이불 덮고 항우울제를 삼키고 눕게 될 것이다. 벌떡 일어나 소비자고발센터에 전화라도 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꼼짝 못 한다. 시장에서의 현금 결제는 반품이 안 된다는 거 안다.

이불 덮고 누워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읽는다. 코르디셉스는 왕개미 머릿속에 들어가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면 개미는 한낮에 나무로 올라가 나뭇잎을 물고 매달린다. 꼼짝을 못 하다 저녁 무렵 죽는다. (중략) 가짜 호랑이 이불을 덮고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읽는다.



* 그래 안다. "가짜라는 거 안다." 다 알면서도 사는 거다. 속으면서도 사는 거다. 아니 어쩌면 정말 반값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산다. 슬쩍 눈길 한번 준 게 혹시나 천 년 전에 맺은 인연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산다. 처음엔 의심쩍었고 망설였으나 어느새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사고야 만다. 이불 한 채도 사고, 베갯잇도 두어 장 산다. 그렇게 사고 또 산다. 시장에서도 사고 지하철에서도 산다. 우산도, 우비도, 랜턴도, 전기 파리채도, 우주 팽이도, 급기야는 추억의 팝송 천 곡도 그렇게 해서 샀더랬다. 그런데 매번 그런다. 매번 현관문을 열고 거실 바닥에다 사 온 물건들을 부려 놓고 있자면 또 속았구나 싶고 또 모질지 못했구나 싶어 우울해지고 자괴감만 든다.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코르디셉스' 때문에 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새로 사 온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워 있자니 이 봄이 참 따뜻하고 산뜻할 것만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이 또한 '코르디셉스'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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