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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연주는…되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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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의 순례자'로 돌아온 57세 피아니스트 서혜경

11살때 국립교향악단과 데뷔
전형적인 천재 피아니스트
11년 전 암과 사투 후 2년만에 복귀
지난해부터 도쿄·홍콩 등 亞투어
"피아니스트 원숙기는 50대부터"


삶과 연주는…되돌이표 피아니스트 서헤경의 연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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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1980년 부조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눈빛이 형형한 동양 처녀 서혜경이 은상(secondo premio)을 수상했다. 압도적인 연주를 했지만 우승자는 아니었다. 부조니 콩쿠르는 이 해에 우승자를 뽑지 않았다. 여론은 그를 '사실상 우승자'라고 했다. 기쁜 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은 서혜경의 승전보에 열광했다. 정부는 12월 20일에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40년이 지났다.


올해 쉰일곱 살. 서혜경은 '건반의 순례자'가 돼 돌아왔다. 지난해 11월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시작해 중국 상하이(2016년 11월24일), 이달 23일 일본 도쿄, 다음 달 6일 홍콩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투어 리사이틀'로 팬들과 만나고 있다. 레퍼토리는 모차르트, 리스트, 부조니,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다. 그의 로맨틱한 타건에 정열과 원숙미를 더해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연주를 들려준다.

서혜경은 23일 도쿄에 머무르면서 아시아경제와 서면인터뷰를 했다. 그의 답변은 활자 사이로 목소리가 들리는 듯 진솔함을 느끼게 했다. 서혜경은 "피아니스트의 원숙기는 50대부터"라면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청중들에게 최상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을 때까지 공연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영국 지휘자 네빌 마리너(1924~2016)를 떠올렸다. "마리너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음반 작업을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모차르트 교향곡들을 지휘했다."


서혜경은 전형적인 천재다. 열한 살 때 국립교향악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연주해 무대에 데뷔했다. 예원학교 2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해 다나카 기요코를 사사하고 1975년에는 뉴욕 매네스 음악학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에게 배웠다. 1977년에는 줄리아드 음악학교에 들어가 사샤 고로드니츠키의 제자가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색채가 풍부하고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됐다.


그는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로맨틱 스타일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잇는 한편 러시아 레퍼토리에 대한 탁월한 해석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은 서혜경의 연주를 통해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곤 한다. 서혜경의 본보기는 로맨틱 스타일의 거장으로 여든여섯 살까지 세계 무대를 누빈 러시아의 슈라 체르카스키(1911~1995), 일흔일곱 살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오스트리아의 알프레트 브렌델(1931~)이다.


서혜경의 예술 세계는 어떤 시련에도 굴함 없이 상승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는다. 그는 2006년 9월 유방암 진단과 동시에 피아노 연주를 포기하라는 의사들의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항암치료와 절제수술을 여덟 번이나 하고, 방사선 치료를 서른세 차례 받으면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마침내 2008년 1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연주하며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그가 복귀무대에서 연주한 협주곡들은 작곡가가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곡으로서 스케일이 큰 데다 각 파트의 표현에서 섬세한 기교를 요구하는 어려운 곡이다. 그는 2010년 여성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도이체 그라모폰)을 녹음했고, 이번 아시아 투어에서도 라흐마니노프를 주력 레퍼토리로 삼았다. 암과의 사투를 끝낸 다음 선택한 라흐마니노프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삶과 연주는…되돌이표 서혜경


서혜경은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은 낭만적이고 애수가 넘치며 영혼이 가득한 러시아 음악 그 자체"라고 했다. '프렐류드 내림 B장조 작품 23-2'는 씩씩하고 웅장한 러시아인의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이면에 담긴 슬픔을 노래하고 '에튀드 C장조 작품 33-2'는 잔잔하고 회화적이다. 러시아의 냄새가 짙은 '소나타 2번'은 협주곡처럼 스케일이 웅장하면서 긴 멜로디 속에 고국에 대한 애착이 담겨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지칠 새 없이 달려왔지만 그의 초심은 변함없다. 서혜경은 "롱런한 대가들은 인내를 가지고 몇십 년 동안 꾸준히 노력했기에 정상의 자리를 계속 유지했다"면서 "타성에 젖어 테크닉 연마와 작품연구를 게을리하면 연주력이 떨어지고, 수준 있는 관중들은 이것을 금방 알아차린다"고 했다. 이 때문에 연주자들은 적절한 긴장감과 정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근간이 되는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후배들의 활약에 매우 기뻐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ㆍ김선욱ㆍ임동혁ㆍ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등을 언급했다. 서혜경은 "모두들 정말 대견하다. 콩쿠르란 몇 주에 걸쳐서 '고시'를 치르는 것과 같다. 낯선 이국에서 심리적인 압박을 견뎌내며 자기 기량을 발휘해 세계에서 모인 수재들과 겨루어 정상에 서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경계도 잊지 않았다.


서혜경은 "콩쿠르는 커리어의 좋은 출발일 뿐"이라면서 "몇 년이 지나면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새로운 우승자에게로 옮겨간다. 피나는 경쟁의 연속인 세계 클래식 연주계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연주력 향상과 레퍼토리 확대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좋은 음악회는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만들어간다. '핫'한 연주자에게만 몰렸다가 몇 년 지나 외면하지 마시고 꾸준히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셨으면 한다"고 국내 관객들에게 당부했다.


서혜경은 부조니 수상 이후 세계를 무대로 살았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국가에서 오케스트라 협연과 리사이틀을 계속했다. 1985년 윌리엄 페첵 상 수상으로 링컨센터에서 뉴욕 데뷔 독주회를 한 이후로 줄곧 정기공연을 해왔다. 1988년에는 피아노의 명가 '스타인웨이' 창립 135주년 기념공연에 이 시대를 이끄는 피아니스트(25명)로 초청됐다.


서혜경은 투병 경험을 남은 반생을 살아가는 데 교훈으로 생각한다. 그는 "최상의 컨디션이 유지돼야 정상급 연주가 나오는데 현재 건강상태는 아주 양호하다"면서 "다만 뉴욕을 본거지 삼아 투어를 다니다 보니 시차적응을 하느라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건강식 위주로 식단을 짜고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긴장감을 수영과 자전거로 푼다고 한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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