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증권시장에서 '평등(Equality)'이라는 단어는 어색하다. 증권시장은 '1원 1표'라는 자본주의적 경제원리가 가장 충실하게 이행되는 곳이다. 돈이 많은 자가 철저하게 부와 권력을 모두 손에 넣는 시스템이다. 혹자는 적절한 긴장과 경쟁을 유발하는 불평등이야말로 이곳을 지탱하는 힘이자 선(善)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공간에서 대부분의 개인투자자들은 돈을 잃는다. 기관과 외국인에 비해 자금과 정보가 현저히 뒤지는 개인이 돈을 잃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100억원을 가진 기관은 1%의 수익만 내도 1억원을 벌지만 1억원으로 투자하는 개인이 1억원을 벌기 위해선 주가가 100% 올라야 한다. 이렇게 돈이 돈을 버는 구조 속에서 개인은 힘없는 한 마리의 개미에 불과하다.
지금의 한국 증권시장은 구조적인 문제에 더해 제도적인 불평등까지 더해져 개인의 투자 의욕을 꺾고 있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선진국에 한참 뒤쳐져 있다. 일부 기관과 외국인은 공매도 제도 악용과 미공개 정보를 통한 주식매매 등으로 개인 투자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그동안 터부시해왔던 평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면 국내증권시장은 돈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는 불모지로 전락할 것이다.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개인투자자 강성원(가명ㆍ45)씨는 지난해 말 필러를 제조하는 A사 주식을 샀다. 투자한지 얼마 되지 않아 A사는 지주사 전환을 추진했다. 합병과 회사 분할의 과정을 거쳐 A사는 알짜 자산을 품은 지주사와 무거운 부채를 떠안은 사업 자회사로 쪼개졌다. 오너 일가의 지주회사 지분율은 원래 갖고 있던 A사 지분율 보다 더 높아진 반면, 강 씨를 비롯한 개인주주들의 지주회사 지분율은 더 낮아졌다. 사업자회사의 부채로 인해 지주회사의 주가도 하락해 개인주주들은 이중의 손실을 본 셈이다.
'눈 뜨고 코 베인' 격인 황당한 사례지만 한국 주식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의 이익이 침해되는 일은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소액주주를 회사의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과를 독차지하려는 대주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보장된 소액주주의 권한이 미약하고, 그나마 있는 제도도 현실에서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 개인투자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22일 공개한 '2016년 대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분석'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그룹 165개 상장사 중 단 8곳(4.9%)만 소액주주 권한 행사를 위한 집중투표제를 도입했다. 이마저도 표면적으로만 내세우고 있을 뿐 아직 집중투표제 방식으로 의결권이 행사된 경우는 없었다.
집중투표제는 가장 대표적인 소액주주 보호제도다.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1주당 1표씩 의결권을 주는 방식과 달리 선임되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한다. 만약 이사 3명을 뽑으면 1주당 3표를 행사할 수 있는데 3표는 각각의 이사에게 줄 수 있으며 한 명의 이사에게 몰아줄 수도 있다. 지분이 적은 소액주주도 얼마든지 자신들을 대변하는 이사를 선출할 수 있다. 만약 강 씨가 투자한 회사가 이 제도를 제대로 시행만했어도 오너 일가에 이익을 몰아주는 방식의 지주회사 전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제도는 1998년 상법 개정으로 도입됐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라서 유명무실해졌다.
주총에 출석하지 않고 서면과 온라인으로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서면투표제와 전자투표제 역시 대표적 소액주주 보호장치지만 이를 활용하는 기업은 극히 드물었다. 대기업 상장사 중 서면투표제는 9.7%, 전자투표제는 16.4%만이 활용하고 있다.
한국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발달한 선진국은 사정이 다르다. 일본에서는 닛케이225지수에 포함된 대기업의 90%가 전자투표제를 이용하고 있다. 전체 상장사 의결권 중 40~50%가 전자투표를 통해 행사된다. 미국도 전체 상장사의 약 45%가 전자투표를 이용하고 있으며 영국도 21% 가량이 활용 중이다.
과거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 등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를 위한 제도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 여당과 경제 전문가, 재계 등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슬쩍 공약 이행을 접었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앞두고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주주 이익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합병 반대 주주 규합에 나서자 삼성은 "외국 투기 자본이 한국 기업을 삼키려 한다"면서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를 위해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개인 투자자들의 목소리는 삼성의 애국심 마케팅에 묻혔다.
엘리엇이 최근 한국 시장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면서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엘리엇이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삼성전자에 인적분할과 배당 등을 요구한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연일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삼성전자는 주주가치 제고방안을 발표하면서 엘리엇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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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주주는 기업이 주주의 목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회사 대표와 임직원들을 위한 방만 경영을 일삼을 경우 이를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모바일게임 '쿠키런'으로 유명한 코스닥 상장사 데브시스터즈는 2014년 상장 이후 임직원 복지가 업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게임개발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노력은 등한시해 주가가 2년 만에 80% 가까이 하락했다. 최근 데브시스터즈 소액주주들은 데브시스터즈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여는 등 집단 행동에 나서고 있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소액주주의 권한을 보호하는 장치가 이미 있음에도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이 이들과 소통할수록 자본시장 전체의 건전성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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