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야는 물론 세계 각국은 트럼프가 선거기간 동안 쏟아낸 말들이 정책으로 구현될 것인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치 지도자가 후보시절 약속을 당선 후 모두 이행하기는 어렵다. 특히, 미국은 후보로서의 선거운동(campaign)과 달리, 대통령은 행정부 구성원, 의회, 언론, 사회단체 등의 의견이 치밀하게 얽혀 움직이는 국가운영체계 안에서 통치(govern)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구가 된 미국(Crippled America)'은 트럼프의 17번째 저술이다. 그의 저서 대부분은 자기의 성공에 기반을 둔 사업 이야기인데 비해, 이 책은 정치에 몸을 던지며 자기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선거운동 기간 중 과장된 몸짓과 어법으로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 가운데 즉흥적이거나 일관성이 결여된 곁가지를 제거하고, 이 책에서 강조하는 일관된 주장들을 살펴보면 향후 그의 정책이 보일 듯싶다.
대외정책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부분 ‘경제적 실리’로 귀결된다. 위대한 미국 재건을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도 군수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염두에 두고 있을 정도이다. 최우선 관심인 이민정책도 결국은 일자리 문제이다. 미국내 1100만 불법이민자가 미국 시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 때문에 남부 국경 1600㎞에 장벽을 치겠다는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발효하지 않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는 거의 기정사실로 보이며, 폐기 시 일부 당사국들과는 미국에 더 유리한 내용의 양자 무역협정을 추구할 수도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탈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주장도 빼앗긴 일자리를 돌려받고 무역수지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어서 어떤 형태로든 시도가 있을 것이다. 상호방위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에 대한 으름장에도 회원국들이 조약상의 의무분담금(GDP의 2%)을 납부하라는 촉구가 깔려있으며, 일본과 한국이 미군 주둔경비를 더 부담하라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향후 대외정책이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유럽, 아시아와 전통적 동맹외교의 근간은 유지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외교정책도 철저히 이해타산에 입각한 거래가 될 것은 분명하다.
한반도 문제는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 추가 도발이 없다면, 우선순위에서 이민, 의료보험 등 국내문제나 ISIS 격퇴 등 강경한 중동정책에 밀려 뒤쳐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다만, 이란 핵합의에 대해 당사국들이 핵시설 완전해체 등 강경한 대응으로 이란 지도자로 하여금 협상을 애걸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몇 배 더 강한 제재를 밀어붙여야 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대목은 북한 핵문제 해결방향의 시사점이 될 수 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우리에게 한미외교의 목표는 주한미군이 상징하는 동맹관계의 발전과 한미FTA를 축으로 하는 통상관계의 증진일 것이나, 당선자의 저서에서 엿보이는 변화라면 전통 동맹관계조차도 주둔비와 같은 ‘경제적 실리’에 좀 더 무게가 실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2019년부터 적용할 차기 주한미군 방위비분담협정 협상에서 우리 측 분담 확대 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협상전략상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반대급부가 무엇인지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연간 300억달러에 육박하는 무역적자 감축을 명분으로 한 한미 FTA 개정요구에 대비해 쟁점분야별 대응방안도 점검해야 한다. ‘위대한 미국’ 회복에 필요한 경제력 보강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트럼프 외교에 대비해 안보와 통상을 아우르는 우리 외교부의 통합적 외교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기존 대미 외교업무의 수행구조나 업무패턴도 세심하게 살펴 정비해야 할 것이다.
이시형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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