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경호 기자]현대자동차 임금협상이 2차에 걸친 합의안과 투표를 통해 가까스로 통과됐지만 노조의 파업이 남긴 숙제는 어느 때보다 많다. 해마다 진행되는 임단협 협상은 노사간에 신뢰를 통해 대화와 협상으로 타결되기보다는 대립과 갈등으로 파국으로 맞게 되고 여기서 발생된 연례파업은 노사는 물론 협력업체와 지역경제, 국가경제 전반으로 피해를 확산시키고 소비자 신뢰와 브랜드 이미지마저 갉아먹는 '승자 없는 게임'이 고착화됐다. 1차 합의안 부결 이후 2차 합의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노노(勞勞)갈등은 현대차 노사관계의 해법을 찾기 쉽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7일 조인식 조업정상화…품질논란에 불매운동까지 신뢰회복 급선무
현대차노사는 17일 윤갑한 사장과 박유기 위원장 등 노사 교섭대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금협상 타결 조인식을 갖고 조업정상화에 나선다. 앞서 노조는 14일 전체 조합원 5만179명 대상으로 찬반투표를 한 결과, 투표자 4만5920명(투표율 91.51%) 가운데 2만9071명(63.31%) 찬성으로 잠정합의안을 가결했다. 노사는 8월 24일 1차 합의안을 도출했지만 조합원 투표에서 역대 최고 높은 78.05%의 조합원 반대로 부결돼 재교섭을 벌였다. 2차 합의안은 1차 잠정합의안 대비 임금 부문에서 기본급 4000원과 전통시장 상품권 30만원 등을 추가 지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노조원 한명이 평균적으로 손에 쥐는 성과급은 1800만원 안팎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5개월여간의 임협 과정에서 24차례의 파업과 12차례의 특근 거부 등으로 자동차 생산 차질은 14만2000여 대, 금액으로는 3조1000여억 원(회사 추산)에 달했다. 국내 파업 사상 최대 손실이다. 노조의 막무가내 파업에 대해서는 협력사와 울산시, 정부와 정치권까지 나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 과정에서 현대차 울산공장은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공장이 침수됐고 출고대기 신차가 침수피해를 입었다.
-3조1천억 생산손실에 5천여개 협력사 피해는 회복불가능
현대차가 미국에서 엔진 결함으로 인한 소비자 보상에 합의하고 국내서도 보증기간 연장 등을 시행하면서 품질논란에도 휩싸인 바 있다. 현대차는 파업과 침수 등에 따른 생산차질을 만회하기 위해 이날부터 24시간 생산체제에 들어갔지만 등돌린 소비자를 다시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소비자들은 억대연봉의 고임금 노조가 구조조정이나 임금축소 등도 아닌 사안을 놓고 파업을 벌인 것에 대해 '귀족노조의 파업'이라고 비판하면서 안티현대차,현대차불매운동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연례파업으로 인한 손실은 현대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는 올해 임협에서 노조의 24차례 파업과 12차례 특근 거부 등으로 생산 차질 규모의 누계가 14만2000여 대에 3조1천여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국내 파업 사상 최대 손실이다.
현대차노조의 경우 잔업과 특근 재개 등을 통해 생산차질과 임금손실분 등을 만회할 순 있지만 협력업체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다. 현대차에 납품하는 전체 협력업체는 1차 협력업체 348개사를 포함해 2,3차까지 합치면 대략 5000여 개에 이른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은 현대차의 파업에 따른 1차 협력업체의 매출 손실액만 약 1조4000억 원으로 알려졌다.
-24차례의 파업에 韓수출·생산감소 등 지표도 흔들
현대차노조의 파업을 두고 현대차사업장이 있는 울산시가 파업촉구에 나선바 있고 정부는 긴급조정권발동의 카드까지 내놓았다. 국회서도 야당 소속 환노위원장이 현대차노조의 파업을 비판했고 박근혜 대통령마저 비판의 대열에 가세했다.이는 현대차노조의 파업이 단순히 개별사업장의 문제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지난 9월 내수판매는 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 주력모델 노후화, 개별소비세 인하정책 종료 등으로 20%나 급감했다. 우리나라의 9월 수출은 현대차 파업 여파 등으로 5.9% 감소했다. 중국과 유럽 등 글로벌 경기 악화로 올해 상반기 자동차 수출은 13.3% 줄었다.
현대차노사관계는 지난 1987년 노조가 설립된 이후 몇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파업을 벌이는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1994년과 2009∼2011년까지는 무분규 타결을 했는데 3년 연속 파업하지 않은 해는 노조 집행부가 합리 노선의 이경훈 위원장 시절이었다. 노조 내부의 경쟁과 갈등은 집행부 성향과 무관하게 노노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까지 지낸 '강성'의 현 박유기 위원장이 이번 임협을 주도했지만 1차 합의안이 부결되고 2차 합의안의 반대목소리가 나온 것도 노노갈등에서 비롯됐다.
-10여개 현장조직이 집행부 견제…파업이 집행부 동력 '역설'
현대차 노조에는 '금속연대'가 집행부 조직을 꾸려가는 가운데 '소통과 연대', '현민투'(현장중심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 '들불', '현장노동자', '금속민투위'(금속민주투쟁위원회), '전혁투'(전진하는 혁신투쟁위원회), '민주현장' 등 10여개 현장조직이 있다. 이들 각 조직은 대의원 조직과 집행부 조직을 장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집행부를 장악하지 못한 다수의 현장조직은 집행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느 집행부도 대의원의 다수를 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집행부는 반대파 현장조직을 두려워해 회사와 합리적인 교섭을 벌이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그간 노조 투쟁을 통해 이론으로 무장된 1000여명의 활동가들이 조합원들을 통제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현대차 노조 지도부의 불안정을 초래하면서 동시에 현대차 노동조합의 비대화와 권력화를 유발하고 있다.
-연례협상에 연공서열형 임금·대체근로 불가가 파업만능주의 고착화시켜
현대차노조가 막무가내식 파업을 벌일 수 있는 데에는 현행 노동관계법의 한계와 현대차만의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때문이다. 매년 임금협상을 하도록 법으로 정해놓다 보니 매년 협상결렬을 이유로 파업이 벌어진다. 급여와 복지는 근속연수가 길면 길수록 비례하고 특별한 귀책사유가 있지 않는 한은 해고되지 않다 보니 노조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게 된다.
근속연수가 증가하면 임금이 자동상승하는 연공급 중심에 각종 수당만 120여개에 달했다. 수당을 받는 당사자인 직원조차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체계를 갖고 있다. 직무가치와 역할 난이도 등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구조다. 독일의 직무급 중심(직무가치+개인성과)이나 일본의 직능급(직능가치+개인성과)과는 다른 구(舊)시대적 임금 체계다. 파업기간에 대체근로가 허용되지 않고 자동차의 경우 대체근로가 허용돼도 자동차생산라인의 특성상 당장의 투입도 어려운 상황이다.
회사측도 연례파업을 30여년간 겪었음에도 노사관계와 노사간 협상에서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내년에는 임금 인상뿐만 아니라 수십 개에 달하는 단체협약 신설 또는 개정 요구안을 놓고 협상하기 때문에 노사는 또다시 충돌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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