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는 음식 에세이를 모은 '소풍'이라는 책에서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의 한 멸치국숫집을 소개했다. 이 집의 국수 말고는 국수로 보지 않는다는 지인이 등장했고, 직접 먹어보니 진한 국물이 과연 비범한 맛이라고 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국수 말고는 국수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이 집의 국수가 아니면 국수도 아니라니. 그렇다면 지금껏 제대로 된 국수 한 그릇 먹지 못한 셈이라 적잖이 속상했고 께름칙한 마음이 들었다. 제주도에 가면 시간을 할애해 이 멸치국수 한 그릇 꼭 먹어야지 결심을 한 것은 이 책이 출간된 2006년이었다.
하지만 10년 동안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제주도에 갈 때면 꼭 먹어야 할 것들을 빼곡히 적어 준비했지만 번번이 멸치국수는 순위에서 밀렸다. 갈치국, 성게미역국, 옥돔, 자리물회, 전복죽, 돔베고기, 뿔소라 등 제주 음식을 앞줄에 세웠고 각재기국이나 몸국, 멜조림 등에도 도전해봐야지 마음먹으면 삼시세끼 빈자리가 없었다. 여유가 좀 있을 때면 메뉴 선택권이 없기 일쑤였다. 국수는 제대로 된 끼니로 여기지 않는 속내도 영향을 줬고 제아무리 맛있어도 국수가 국수 맛이지 하고 앝잡아 보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국수를 먹어야 한다면 제주도식의 고기국수나 순대국수가 먹고 싶었다. 걸출한 제주 음식들 사이에서 한낱 멸치국수는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올해 10년 만에 그 멸치국수를 먹게 된 것은 다분히 우연이었다. 숙소에서 밥을 지을 요량으로 표선면의 한 슈퍼에서 휴대용 버너를 샀는데 가져와보니 작동하지 않았다. 다음날 지나는 길에 다른 상품으로 교환을 해야겠다 싶어 그 슈퍼 근처에 주차를 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그 국숫집의 간판이 떡 하니 보였다. 이제는 먹을 때도 되지 않았냐는 듯이.
하지만 슈퍼 주인이 버너를 쓰고 일부러 망가뜨린 뒤 환불하려 한다고 의심을 하는 바람에 한참 승강이를 해야 했다. 이게 되지 않을 리 없다며 거칠게 시범을 보이려다 주인은 손을 베었고 피가 제법 많이 났다. 그 피를 보니 어찌됐건 이날 그 멸치국수를 먹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언쟁 중인 상대가 스스로 피를 보이는 경우가 살다가 얼마나 있을까 싶었고, 때마침 바로 앞에 10년 전부터 벼르던 국숫집이 있을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될까 싶었다.
간신히 오해를 풀고 서둘러 국숫집에 가 단일 메뉴인 멸치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냄비째 나온 국수의 면발은 제법 굵었고 따뜻하고 진한 국물에 잠겨있었다. 이 국물을 한 숟가락 뜨니 드잡이를 할 뻔해 다소 언짢았던 마음이 진정됐다. 맛은 평범했지만 소박하고 기품이 있었다. 최고라고 치켜세우기는 어려웠지만 한 그릇에 가득 찬 정성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출하지도 않고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지만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응원은 아마도 이 국수 맛을 닮지 않았을까 싶었다. 면발을 후루룩 입에 넣는 순간 이 국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범할지라도 품위 있는 사람. 능성어나 송로버섯 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제구실을 할 줄 아는 그런 사람.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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