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막말과 기행에도 잘나가던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스텝이 요즘 꼬였다. 웬만해선 꿈쩍도 하지 않던 지지율도 흔들리고 있다.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실언과 식언은 다반사였지만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가 된 이후 검증의 잣대는 한층 엄격해졌다. 이를 겨냥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 부적격론’도 절묘했다.
‘미 합중국 대통령의 자격’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핵 단추’ 혹은,‘핵 가방’이다. 힐러리 후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트럼프가 핵 단추를 누르게 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핵 가방은 미국 대통령이 이동할 때 어김없이 함께 동행 한다. 핵 가방에는 미국이 보유한 1000개 안팎의 핵탄투를 발사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미국 대통령은 핵 가방을 작동시키는 카드인 ‘핵 비스킷’을 지니고 있다. 핵 가방과 핵 비스킷을 이용해 백악관의 핵 코드(명령어)를 입력시키면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를 발사시켜 원하는 지역에 떨어뜨릴 수 있다.
이 결정은 철저히 군최고사령관인 미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미국 정부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려면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핵 가방 사용에는 이런 견제 장치가 없다.
전문가들은 미국 대통령이 적국이나 테러단체가 미국에 대한 핵 공격에 나선다고 판단될 경우에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선제, 보복 핵 공격 명령을 내리는 상황은 불과 수십 분 만에 이뤄질 것으로 본다. 순간의 판단에 미국은 물론, 인류 전체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핵 가방은 미국 대통령만의 전유물만도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취임식 때마다 전 세계에 핵 가방 인수식을 ‘자랑스럽게’ 공개해왔다. 지난 1999년에도, 두 번째 취임식인 2012년 취임식에도 검은색의 핵 가방이 등장,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의 건재와 미국에 대한 견제를 의식한 이벤트다.
따지고 보면 주요 핵보유국 간의 이 같은 팽팽한 긴장 관계는 강대국간 전쟁이나 핵전쟁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져온 게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그 긴장과 균형이 고의든, 실수든 어긋나기 시작하면 언제든 핵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최근엔 북한의 핵 개발이나, 중동의 과격 이슬람 테러단체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이 이 같은 균형을 깰 수 있는 돌출변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트럼프에 의해 부각된 미국의 핵 가방 논란은 국제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핵 위협 속에 노출돼 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더구나 좀처럼 해법을 못 찾고 있는 북핵을 머리에 안고 사는 우리로선 그저 미국 대선의 화제로 가볍게 넘길 얘기가 아닌 것 같다.
뉴욕 김근철 특파원 kckim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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