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만나는 미술, 향수와 동경
[아시아경제] 2002년 8월3일. 쾰른에는 비가 내렸다. 중앙역 앞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은 배낭을 지고 왔다. 중앙역 맞은편, 터키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케밥과 콜라로 첫 저녁을 먹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쾰른 변두리에 있는 반지하 단칸방으로 함께 갔다. 내 하숙집이 거기 있었다. 아들은 이틀을 묵은 다음 쾰른 중앙역에서 기차를 탔다.
파리에 간 아들은 오르세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들이 오르세미술관에서 보낸 시간은 루브르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그리움을 남겨둔 채 파리를 떠났다. 나는 오르세미술관에 남긴 아들의 그리움과, 약속을 이해한다. 그가 결혼한다면 신혼여행은 파리로 가지 않을까. 오르세미술관으로.
나는 오르세미술관에 걸린 클로드 모네의 그림, '생 라자르 역'의 풍경을 좋아한다. 그림은 아들이 남겨두고 온 그리움과도 같이 아득한 빛깔 속에 관객의 영혼을 과거의 한 순간으로 실어 나른다. 모네는 1877~1878년 사이에 생 라자르 역을 여러 장 그린다. 빛과 대기의 흐름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이미지를 매번 다르게 표현한다.
기관차, 기관차가 내뿜는 수증기, 주위를 둘러싼 대기는 빛이라는 현상 속에 어우러져 혼곤히 녹아들면서 하나의 사물을 이루었다가 풀어져 또 다른 사물로 이행한다. 빛은 사물을 표현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빛나며 사물과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 생명의 다리가 된다. 기차가 거친 숨을 내뿜는 플랫폼은 바로 '그리움'이 아니던가.
오래된 기차역의 플랫폼은 처연한 그리움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연락선이 떠나는 포구처럼. 전혜린이 말한 '먼 곳을 향한 그리움(Fernweh)'이 그곳에 있다. 아들도 모네의 그림을 보았으리라.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우리가 본 그림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배낭을 짊어진 젊은 나그네가 본 생 라자르 역은 양복을 입은 출장객이 본 모네의 그림과 같을 수 없다.
오르세미술관 역시 원래는 기차역이었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많이 전시돼 있다. 빈센트 반 고흐나 폴 고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뛸 것이다.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해 눈에 보이는 세계를 기록했다.
고흐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전시가 옛 서울역에서 열렸다. '반 고흐 인사이드:빛과 음악의 축제'다. 지난달 8일에 시작해 오는 4월17일에 끝난다. 고흐의 작품 247점과 모네, 고갱 등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 153점을 볼 수 있다. 실물 그림은 아니고, 초고화질 이미지로 촬영해 프로젝터로 스크린에 비추는 영상이다.
공간마다 다른 주제로 작품을 보여준다. 1층에 있는 3등 대합실에서는 '뉘넨의 또 다른 해돋이'라는 제목으로 초기 인상주의 작품을 소개한다. 1층 중앙 홀에서는 '파리의 화창한 어느 날'을 통해 고흐가 일본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화법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1, 2등 대합실에서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만난다. 바로 이곳에서 돈 매클레인이 노래한 '빈센트'를 느낀다.
"별이 총총한 밤, 밝게 타오르는 듯 활짝 핀 꽃과 보랏빛 안개 속에 소용돌이치는 구름… 별이 총총한 밤, 텅 빈 홀에 걸린 초상, 이름 모를 벽에 걸린 채 세상을 바라보는 액자도 없는 초상들… 당신이 내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2층 그릴로 올라가면 '오베르의 푸른 밀밭에서' 고흐가 기다린다. 고흐가 생 래미의 정신병원에서 나와 오베르에 있는 쉬르 우아즈에 머물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까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간 시기에 그린 그림들이 보인다. 여기서는 새와 풀벌레의 울음, 밀밭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통해 오베르의 전원을 느낄 수 있다.
옛 서울역은 일본인 건축가 쓰카모토 야스시(塚本 靖)가 설계한 건물이다. 1922년 6월 1일 착공해 1925년 9월 30일에 완공했다. 원래 이름은 경성역이었다. 네오바로크 양식을 가미해 지었다. 서울의 신세계백화점 옆에 있는 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도 네오바로크 양식이다. 일본 삿포로의 홋카이도청사, 독일 비스바덴의 중앙역도 같은 양식이다. 비스바덴 역은 서울역과 정말 흡사하다.
기차역의 운명은 끝내 미술관일까. 서울역은 죽어버린 시대의 죽어버린 역이다. 고색창연한 역사는 더 이상 기차표를 나눠 주지 않는다. 그러나 헤아릴 길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그리움을 각성케 한다. 한 시대를 향한 향수와 먼 곳을 향한 동경.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삶의 한 순간을 자각한다. 고흐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강력한 촉진제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으로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전혜린)
오는 4월17일까지(1522-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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