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이러쿵저러쿵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성욕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제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성욕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대개 100년 이하로 살게 되어있는 인간은, 자신이 죽고난 뒤의 기획인 성욕에 대해 눈멀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성욕을 표현하는 말로 쓰는 ‘짐승’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던 때 영원을 만들어낸 비밀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면, 이런 얘기다. 태초에 하느님이 식물을 창조하고 동물을 창조했다. 식물에겐 움직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특권을 줬고 동물에겐 움직이면서 살 수 있는 특권을 줬다. 사실 식물은 홀로 살 수 없는 생명이다. 동물이 없다면 식물은 결코 살지 못한다. 식물의 섹스를 주선하는 마담뚜는 동물들이다. 식물이 세대를 바꿔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는, 벌레들이다. 벌레들의 식욕이 식물의 성욕을 매개한다. 벌레들은 식물이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지상의 하느님’에 가깝다.
움직이는 동물들은 자기의 종(種)끼리 스스로 사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줬다. 고양이가 코끼리를 능욕하고, 파리가 잠자리를 겁탈하는 게 상상이 되는가. 물론 세상에는 늘 변경이 있기에, 원숭이 젖을 먹고 자라는 인간이 있고, 돼지 엄마와 살아가는 양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섹스는 자기 종에 관한 문제다. 왜 그러냐 하면, 조물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너희들끼리 해결해라. 나한테 물으러 오지 마라.
인간은 짐승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짐승이지 않은 인간은 없다. 그 어원인 즘생은 중생(衆生)이기도 하다. 자기는 짐승,이라고 말할 때, 그 ‘짐승’은 성욕의 순정성을 지닌 인간에 관한 표현이다. 짐승 모두가 가진 고유의 특징, 앞 뒤 안가리고 섹스에 골몰하는 점이다. 섹스는 사실 상대에 대한 배려행위는 아니다. 오히려 상대에 대한 공격 행위에 가깝다. 상대를 속이고 유혹하고 제압하고 빼앗는 행위에 가깝다.
인간이 섹스에 관해 가지는 기본적인 '정서'는 악(惡)에 가까워 보인다. 섹스는 나쁜 짓이란 얘기다. 섹스를 굳이 어둠을 택해서 하고 굳이 이불 속에서 하는 건, 그 ‘억눌린 본질’을 의식함이다. 인간의 고질적인 위선은, 사춘기 시절 성욕을 만나면서 생긴 혼란에서 비롯된다. '자기 짐승'이라 할 때, 거기엔 욕설과 칭찬이 정교하게 버무려져 있다. 욕설이 심할수록 칭찬도 커지는 기묘한 언어구조다. 저 하느님의 기획에 대해, 인간의 왜 그렇게 죄의식을 지니게 됐을까. 성욕을 심어주면서 부끄러움을 함께 넣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죄’란 성욕을 증폭시키는 부끄러움의 다른 이름이다. 성욕은 금기를 깨는 즐거움이다.
착한 글래머. 이 말 속에는 인류의 무의식이 숨어있다. 글래머는 원래 착하지 않다는 통찰, 이걸 주목하는 게 필요하다. 글래머는 여성의 몸의 형상일 뿐인데, 거기에 왜 착하다는 말이 들어가나? 그렇다면 나쁜 글래머는 어떤 것인가. 글래머는 남자들이 꿈꾸는 음욕(淫慾)의 몽유도원도이다. 거긴 짐승같고 늑대같은 마음이 끼어든다. 글래머를 향한 눈먼 돌진, 그것이 세상 사내들의 꿈이다. 그러니까 글래머는 사고 치기 딱 좋은 대상이다.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기묘한 아우라, 모든 남자의 판단을 정지시키는 그 나쁜 유혹의 시스템. 그래서 모든 글래머는 나쁘다는 얘기다.
그런데 갑자기 착한 글래머가 등장한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모든 글래머는 위험하다. 거기엔 유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혹을 기획한 건 여성들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여성들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부여받은 몸뚱이를 그냥 지니고 있을 뿐이다. 착한 글래머는, 창녀처럼 노골적으로 유혹하지 않는 여성의 순수에 대한 예찬이다. 무심코 보여주는 여성의 정결한 노출. 그것이 착한 글래머다. 착한 글래머는, 육체는 유혹덩어리인데 마음은 아직도 소녀 수준인, 여자들에 대한 호명이다. 사실 이 모순이 남자들을 격동시킨다. 저 착함을 범하는 환상이, 순진무구를 더욱 유혹적으로 만드는 심리라는 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착한 글래머라는 말을 발명한 사람은, 이 시대 기민한 에디터다. 일본의 그라비아 모델을 번역하면서 이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라비아는 고급 인쇄물을 가리킨다. 질 좋은 종이에 아름답게 인쇄된 여자 모델들의 유혹. 이걸 대한민국은 ‘착한 글래머’라고 번역했다. 착하다는 말과 선하다는 말은 비슷해보이지만 꽤 다르다. 선한 사람은 자기 주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선함을 베푸는 사람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은 주체성이 부족하다. 절대로 착함을 베풀 수는 없다.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으응, 착하지” 라고 말하는 분위기를 생각하면 된다. 선함에는 위계가 없지만, 착함에는 그게 있다. 착한 사람은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아래에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착한 글래머’는 여자에 대한 정교한 차별이다. 이 말에 들어있는 ‘마초’를 이해하는 건, 이 사회의 억눌린 사내들의 ‘오래된 유토피아’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