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 동전 없는 사회가 실현되더라도 지폐 생명력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신용카드와 모바일결제 등이 화폐를 대체하며 동전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지만 보유 재산을 현금 형태로 보관하려는 수요로 여전히 지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지폐의 보유 수요는 특히 경기가 어려울수록 더 높아진다.
독일 조폐업체 G&D에 따르면 신용카드와 여타 형태의 전자지불수단 사용이 두자리 숫자의 증가율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지폐생산량 역시 연간 5%씩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G&D는 전 세계 100개 통화권에 지폐를 찍어 공급하는 회사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작년 1월에서 11월까지 5만원권은 18조4769억원 어치 발행됐다. 이는 2009년 6월 첫 발행된 이래 연간 규모로 사상 최대 규모다. 이 기간 5만원권 환수율은 40.6%로, 전년 29.7%보다는 다소 높아졌다.
5만권권의 수요가 이처럼 높은 것은 지하경제의 수단으로 고액 지폐가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탈세, 뇌물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하려는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폐의 생명력도 여전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종종 터지는 비자금 사건이나 주인없는 돈다발 사건에서 등장하는 지폐는 대부분 5만원권이다. 사과상자를 5만원권으로 채우면 25억원이, 비타500 상자에는 5000만원을 채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침체로 불확실성이 높아진 것도 5만원권의 매력을 높인 요인으로 지목된다. 저금리, 낮은 인플레이션율 등 거시 경제여건이 불확실해질수록 현금 보유 선호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경기위기가 반복되는 한 고액 지폐의 생명력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작년 금융위기를 겪었던 그리스에서도 대규모 뱅크런(예금인출) 사태가 나올 정도로 현금 수요가 급증한 바 있다. 2008년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을 때도 고액 지폐를 찾는 수요가 급증했다.
우리나라에선 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세뱃돈 등으로 쓸 신권을 구하려는 수요가 여전한 것도 지폐 종말론을 늦추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국은행이 작년 설 때 시중은행에 공급한 화폐는 5조2295억원에 달했고, 추석 땐 4조7057억원을 공급했다. 이는 평소 월간 순발행액의 1.5∼2배 수준이다.
한은 관계자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지폐 수요가 여전히 많은 편"이라며 "현금없는 사회의 연구는 동전에 한정해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정 기자 mybang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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