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13년전 6월 30일 오늘입니다. 2002년 월드컵열기가 한참이던 때 제2연평해전으로 목숨을 잃은 고(故) 박동혁 병장을 처음 만났었죠"
당시 박 병장을 치료한 군의관은 바로 강원의대 이봉기 심장내과 교수다. 그는 2000년 대위로 입대해 육군 3사단을 거쳐 백골부대로, 서부사하라 유엔평화유지군(PKO)으로 근무를 했다. 박 병장을 처음 만난 것은 국군수도병원에서 근무할때다.
그는 연평해전이 발생한 날을 떠올리며 "당일에는 병원 상공에 여러 대의 헬기가 뜨고 내렸어요. 연평해전이 발발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내과에서는 할 일이 없어 퇴근을 했죠. 하지만 다음날에 급히 출근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박 병장을 처음 만났을때를 회상하며 "내가 군의관이 된 이래 목격한 환자 중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을 달고 있던 환자였죠. 의무병이었던 박 병장은 부상병을 찾아 이동을 했기 때문에 전투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박 병장 몸에서 부상자 중 가장 많은 100여 개가 넘는 파편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를 비롯한 군의관들의 노력으로 박 병장은 차츰 회복세로 접어들어 일반병실로 병실을 옮겼고 어느덧 군의관들과 정도 돈독히 쌓였다. 하지만 왼쪽 다리가 문제였다. 박 병장의 대퇴부 동맥에 박힌 파편이 썩으면서 결국 왼쪽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정신과 군의관들도 투입, 심리치료도 병행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한 달도 안돼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 보니 뇌에 세균이 감염됐다. 민간에서 좋다는 항생제도 있는 대로 다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사투를 벌인 지 84일 만이었다.
이 교수는 지난 1일 서울 코엑스 한 대형극장의 영화 시사회장을 찾았다. 오랜만에 유족들의 얼굴과 생존장병들의 얼굴도 봤다. 반가운 마음도 영화가 진행될수록 숙연해지더니 30여 분에 이르는 교전 장면이 나올 때는 울음바다가 됐다.
이 교수는 "유가족들이 속상한 것은 나라가 6명의 용사들을 챙겨지않고 국민들도 차츰 잊고 있다라는 점"이라며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2시간동안 연평해전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젊은 영웅들을 생각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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