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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호국의 달, 정동과 전시작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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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호국의 달, 정동과 전시작전권 이명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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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오후 서울 정동 덕수궁 왼쪽 담장 맞은편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처음으로 일반에 개방된 미국대사관저 안에 들어가려는 그 사람들 속에 정동 답사기행에 참여한 필자도 있었다. 이날의 개방이 한미친선의 치밀한 생각에서 기획됐건, 몇 달 전 피습 때 한국인들이 보여준 온정에 감동한 미국대사의 호의에서에 비롯됐건 간에, 또 그렇게 문이 열린 대사관저를 휴일의 볼거리로 찾아온 이들이건, 금단의 성역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이들이건 간에 대사관 안은 적잖게 볼 만한 것이었다. 미 대사가 한옥에 사는 것을 본 사람들 마음에는 반가움도 일었을 듯하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 밀고 들어온 불편함이 있었다. 언덕 위 관저로 올라가는 비좁은 길의 한 귀퉁이에 뒤엉킨 채 먼발치에서 저 위 '성채'를 올려다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 앞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걸 까치발로 안간힘을 쓰면서도 그걸 당연한 듯 감내하는 모습, 그것은 자신의 땅에서 손님이 된 것을 보는 듯한 궁색함이었다. 치외법권지라는 사정으로도 지울 수 없는 모욕감까지를 안겨다주는 풍경이었다.

그 다음으로 둘러본 영국대사관 주변에서 그 불편함은 더욱 커졌다.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 됐지만 영국대사관은 덕수궁의 우측 담장에, 궁을 바짝 밀어붙이듯 들어서서 남의 나라 궁궐 안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남의 집 안방, 그것도 궁궐의 안마당에까지 고개를 밀고 들어오는 무례한 손님을 보는 듯했는데, 그 무례는 덕수궁 위편의 호젓한 골목길을 차지하곤 열어주지 않는 고압적 태도와도 겹쳤다.


구한말의 오욕과 파란이 펼쳐진 정동. 시간여행을 위해 떠난 그곳,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들어섰던 그곳은 과거이자 현재였다. 시간은 불연속적으로 단절돼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그곳엔 구한말 속의 현재, 2015년 속의 1895년이 겹쳐 있었다. 정동 높은 언덕에서 왕도의 중심지를 한눈에 내려다봤던 옛 러시아공사관에서 아관파천의 치욕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우리는 지금 그 굴욕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가,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아관파천 후 1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확고한 독립국이다. 독립국을 넘어서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라는 자부(自負)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국민과 영토와 함께 나라의 3요소라는 '주권'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주권적일까. 주권을 갖는다는 건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성인의 주권을 스스로 갖고 있는 것일까.


지난주에 육군의 최고위 장성들과 저녁을 함께 했었다. 최고 엘리트들답게 그들의 절도 있는 언행은 믿음직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아쉬웠다. 전시작전권 환수 포기 얘기를 할 때 그들은 북핵 위협이 조성하는 '현실'의 사정을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전작권을 반드시 돌려받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얘기하는 현실은 매우 협소해 보였다. 눈앞 현실 너머의 큰 현실, 그 '대(大)현실'을 보려는 안목이 필요해 보였다. 자주의 의지, '주권적 성인'이 되려는 성장통과 고뇌, 그것 또한 우리의 군에 필요한 현실이어야 할 것이다. 그 큰 현실을 볼 때 군은 스스로를 묶는 보이지 않는 결박을 풀 것이며, 스스로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벽을 벗어날 것이다.


최고위 장성들은 우리의 사병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병사들이라고 했다. 그 똑똑한 젊은이 수십만 명을 통솔하는 장군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지는 삼정도(三精刀)의 위엄에 값하는 기개를 봤으면 한다. 그것이 '호국의 달' 6월에 호국의 간성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자랑스러운' 군은, 우리가 아직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120년 전 '아관(俄館)'에서의 자기유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한 길을 열 것이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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