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직속상관인 비서실장의 지시를 거부하는 '항명'을 하고, 청와대가 즉각 그의 해임을 결정하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 표면적으로는 국회의 정치공세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게 항명의 이유지만, 현실적으로 발생하기 어려운 일들이 연속해 일어난 데는 모종의 시나리오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은 9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라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민정수석이 여야 합의사항과 비서실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데 대해 인사권자(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는 등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이 자신이 민정수석에 보임한 지난해 6월 이전에 발생한 일이라 잘 알지 못하며, 자신의 국회 출석 여부가 정치공세로 변질된 데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면서 "지난 25년간 특별한 경우 외에는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관행으로 정착돼 왔던 것인데,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출석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설명도 민 대변인을 통해 전했다.
하지만 과거 민정수석의 국회출석이 다섯 번이나 있었고, 설사 출석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했어도 직속상관인 김 실장의 명령을 현실적으로 수석비서관이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김 실장은 김 수석의 법조계 대선배(각각 사시 12기, 24기)이며 공직기강이 가장 확실한 청와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편 김 수석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공세에 몰려 청와대와 박근혜 대통령을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문건 유출 사고는 김 수석의 근무 이전 일이지만,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 민정수석실이 최모ㆍ한모 경위를 회유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민정수석실 책임자인 김 수석의 해명이 필요하다.
국회에서의 질의응답을 통해 이 사안을 둘러싼 의혹과 파문이 오히려 증폭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퇴를 통한 불출석이란 결단을 내린 게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바라보는 방향을 조금 바꾸면 12일 있을 박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을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김기춘 비서실장과 실세 비서관 3인방(이재만ㆍ정호성ㆍ안봉근 비서관)의 거취문제 등 청와대 인적쇄신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언급해야 하는데, 김 수석의 '해임'으로 이를 대신하는 모양새를 만들 유인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김 수석 본인의 해명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의 사퇴는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는 것과 박 대통령이 대답해야 할 곤란한 질문의 추가를 맞바꾼 결정이 될 수도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박 대통령은 김 실장과 3인방에 대한 유임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으로 "추후 수사에서 잘못이 발견된다면 일벌백계 하겠다"거나 "경제활성화를 위해 국정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울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는 박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명분이지만, 청와대 고위 참모진 간 '항명파문'이 벌어질 정도로 공직기강이 무너졌다는 비판이 더해짐에 따라 박 대통령은 파문 당사자들을 유임시키기 위한 명분 하나를 3일안에 추가해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떠안게 된 셈이기도 하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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