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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쪽의 기나긴 슬픔, '불안의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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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문학을 읽는다는 건 일말의 ‘슬픔’을 포함하는 행위다. 다른 장르의 ‘읽기’가 사고의 힘을 확장시키며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때때로 자신의 삶을 떠받쳐온 기둥이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열패감에 엎드려본 자들의 피난처가 된다. 문학에 종착하는 대상은 삶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 명쾌하지도 쾌활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란 점에서 불안을 잉태하기에, 다른 책과 달리 문학책을 선물하는 데는 다소 고민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문학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려면 그가 삶의 낮고 어둡고 비루한 면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한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1935년 고향인 리스본에서 죽은 뒤 친구들은 그의 방에서 커다란 궤짝 하나를 발견한다. 그 안에는 페소아가 포르투갈어, 영어, 프랑스어로 틈틈이 써놓은 원고 2만7000여매가 들어 있었다. 그중 ‘불안의 서’라고 적힌 봉투 5개에 약 350편의 초고와 단상이 남겨져 있었고 페소아 연구자들이 유고 더미에서 ‘불안의 서’에 속한다고 판단할 만한 텍스트 150여개를 더 찾아, 이 책이 세상에 드러났다. 따라서 ‘불안의 서’는 저자가 직접 한 권으로 완결시킨 글이 아니기 때문에 구성이나 내용에서 일반 독자가 기대할 수 있는 일관성이 희박하다.

800쪽의 기나긴 슬픔, '불안의 서(書)' 불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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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밀어넣는다면 거칠게 에세이라고 소개될 수 있겠지만 장르를 규정하는 일이 그래서 쉽지 않다. 작품의 화자이자 작가의 이명(異名)인 ‘소아레스’가 “내 정신의 주성분인 시시한 몽상”이라고 일컬은 단상들이 짧으면 원고지 2~3매, 길게는 20매 분량의 개별 텍스트로 무려 807쪽에 걸쳐 펼쳐진다.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라는 화자의 비관(悲觀)은 페소아의 고향인 리스본에 뿌려지는 빗줄기,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빵 부스러기, 가로등, 아이들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슬픔을 입힌다. 명예, 성공, 편리함, 소음과 번잡함 등이 인정받는 시대에 역행하는 어둠,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에 사로잡힌 소아레스는 작은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회계장부에 수치를 채우고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며, 특별한 친구나 연인도 없이 일상을 부지한다. 그에게는 정제되지 않은 상상력과 내면으로의 침잠만이 허락되며 그 순간, 그는 세상의 어떤 부와 명예를 가진 자보다 높이 도약한다.


“리스본의 보조회계원인 나를 하찮게 여기는 시선을 나는 깃발처럼 들어올린다. 나를 비웃는 비웃음은 내 팡파르가 되어 울린다. 그 팡파르 소리와 함께 내 아침이 열리고,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한다.…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멀리 솟아난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채를 묘사하거나 나 자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소아레스는 ‘죽는 날까지 회계원으로 일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일상의 온갖 감정과 사유를 활자로 옮긴다. 그에게 시와 문학은 “엉뚱하게 내 머리에 올라앉아 나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나비일 뿐”이다. 나비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는 초라하고 왜소해진다. 그러나 소아레스는 이토록 고독하게 태어난 생(生)에 비밀스럽게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운명이 나에게 준 것은 몇 권의 회계장부와 꿈꾸는 능력, 단 두 가지뿐”이라고 말하며 그 누구도 사랑해주거나 칭송해주지 않는 보조회계원으로서의 피상적 일상을 다음과 같이 드높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하루의 모든 내용을 칠판에서 지워내는 일, 우리 감정의 처녀성을 반복해서 부활시키는 일, 오직 그것만이 존재와 소유의 가치가 있다. 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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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롭고 위태로운 책을 누구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불안의 서’는 독자를 설득하지도, 현혹하지도 않는다. 불모(不毛)의 생 한가운데 독자를 벌거벗겨놓고, 오롯이 슬픔만을 직시하는 기나긴 노래다.


어느 노랫말처럼, 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침범당하지 않는 영역은 각자의 내면뿐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 생존을 넘어 '존재'를 구가하는 데는 내면의 자유가 절대적이며, 이를 비옥하게 하는 것은 현실 기능보다는 비현실 기능을 발휘하는 정신이다. 작가 페소아에게 비현실 기능의 지배를 거부하지 않는 정신은 “도시 위를 비추며 점점 퍼져나가는 냉엄한 달빛처럼, 내 존재 위에서 말없이 나를 비추는” 지고의 위엄이었다. 그리고 800쪽 넘는 그의 슬픔을 침묵 속에 따라가는 독자는 ‘불안’과 화해하지 않는 가운데 기묘한 평화를 얻게 된다.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배수아 옮김/봄날의 책/2만8000원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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