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런 사람이야 No.1
“나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지만 나의 가족은 더 이상 나의 가족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에게 돌팔매처럼 자조를 던지던 1970년, 병기는 중학생이 되었다. 시한부 암환자가 암 선고 진단서를 바라보듯 사르트르의 철학서를 들었다. 책을 펼치자 어디에선가 바람이 일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풍겨온다. 까뮈를 펼쳐들자 바람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니체를 한 장 넘기려는 순간 바람은 이해할 수 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네가 태어난 순간 신은 죽었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신을 볼 수 있었으려나. 내가 왜 태어났는지 태어나기 전에 물어볼 것을, 내가 웃는다고 그 답을 아는 건 아니야“
병기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책들을 덮었다. 더 이상 바람은 노래하지 않았고 의문은 그 선택과 함께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김병기 대표(58세) : 물어보시지 않았다면 그때를 영원히 기억하지 않았을 겁니다. (웃음) 제가 태어나고 이듬해에 어머니는 밭일을 하시는 중에 제 울음소리를 용케도 들으시고 밭두렁을 건너시다가 차에 치여 돌아가셨습니다. (잠시 마른 손을 부비는 듯 하더니 눈망울이 흔들렸다) 아마도 젖을 주시려 오셨겠죠. 초등학교 2학년 때 고향인 전북 부안을 떠나 형들이 있는 서울에서 살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그 집을 떠나던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형들에게 맞았습니다. 밥 먹을 때도 눈치가 보여 밥 먹듯이 밥을 굶었죠. 너무 배가 고파 형수님이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식탁 위에 있던 십 원을 훔쳐 찐빵 두 개를 사먹었어요. 찐빵을 다 토해낼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때,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중학교 3학년이 돼서야 병기는 그의 형들이 이복형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게… 왜?”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겠다는 마음으로 다다른 곳은 동대문고속버스터미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꺼내 “이 돈만큼 갈 수 있는 표를 주세요”라고 말했다. 매표소 창구에서 얼굴을 내민 차표에는 ‘대구’라고 쓰여 있었다.
“네가 어떤 사람이이냐 하는 것은 네가 선택한 자유의 결과이다” 흔들리는 차창을 스치는 바람이 덮어두었던 사르트르의 노래를 다시 들려주었다. 김병기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병기군의 구두닦이 생활. 말 그대로 ‘꽃거지’가 되었다.
그때 심정은?
하루에 한 끼를 먹고 아무데나 몸을 눕혀 잠을 청해도 마음은 제가 닦은 구두코처럼 반짝반빡 빛이 났어요. 그 때 제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벌자’였습니다.
대구의 어느 모퉁이에서 가죽이 벗겨지도록 구두를 닦고 있던 한 소년의 검뎅이 묻은 얼굴에 말을 걸어오는 청년이 있었다. 구두를 닦아주며 한마디… 또 한마디… 청년의 질문에 또렷하게 답변하는 그 소년의 답이 놀라울 정도로 철학적이었다. 그들의 구두담(談)에는 오늘내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은 소년 병기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창고 옆에 붙어있는 쪽방 문을 열어젖히더니 말했다. “네가 이집을 나가게 될 때가 올 거야. 그때까지는 책을 놓지 마라” 따뜻한 이불 옆에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검정고시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참 가슴이 뛰는 느낌이잖아요? 구두 닦는 마음으로 책에도 광을 내서 검정고시에 합격을 하고 다음 해에 경영학과 대학생이 됐어요.
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던가… 저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죠. 알 수 없는 불안감, 높은 담벼락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느낌, 그 담벼락에서 뛰어내고 싶은데 다리는 덜덜 떨려오고, 하지만 질끈 눈감고 뛰어내리는 기분이랄까….
“불안이란 자유가 느끼는 현기증이다”- 장 폴 사르트르
무작정 자유로워서였을까 아니면 너무 불안해서였을까. 닥치는 대로, 병기씨는 도심의 차가운 골목 한켠에서 24시간, 무심코 돌아가는 냉장고의 모터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면서도 냉정하게 일에만 몰두했다. 운좋게 들어간 후지카 필름의 근무시간이 끝나면 포장마차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늦은 밤이 되면 쟁반을 들고 웨이터가 되었다. 주말에는 동성로 가람다방에서 판돌이라 불리던 디제이를 하면서 다음 일을 구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꺼풀이 발에 밟힐 때까지 일을 해도, 쥐꼬리만한 급여를 모으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았던 병기씨는 미용재료 판매업에 손을 댔다. 내가 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영업. 짙은 눈썹의 미소년 같은 얼굴로 철학가 같은 명언들을 툭툭 던지며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병기씨는 서서히 영업의 귀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인생을 뒤흔들어놓은 또 다른 선택의 앞에 섰다.
그때 그 미용재료를 팔다가 미용실 아가씨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 아가씨의 얼굴에 반해서 가슴이 벌렁거리던 나를 보며 책에서만 보던 ‘외로움’이 내 온몸에 퍼져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됐죠. 그때가 제 나이 스물여덟. ‘결혼하자’ 마음 먹은 순간 제 자신을 영업하기 시작했죠.
영업의 귀재 김병기는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의미를 알게 된 그는 더더욱 앞만 보고 달리는 사업가가 되었다. 그 당시 누구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던 ‘삐삐(무선호출기)’와 휴대폰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이동통신 대리점 사업과 사무기기를 파는 삼성전자 대리점 사업을 하며 번뜩이는 영업수완을 발휘하던 그는,
저도 제 자신한테 놀랐죠. 과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고, 단순한 영업을 넘어서자 생각한 순간마다 새로운 길이 보였어요. 카폰을 처음으로 선박에다 장착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또 대박이 났어요. 선주들이 오히려 저를 찾아다녔죠.
뻔하고 쉬운 얘기 같지만 일을 할 때 미쳐야 한다는 말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 저를 보면 알 수 있었던 때였어요. (웃음) 그런데 내가 선택한 것에는 무지막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된 시기였어요.
가족과 사랑에 궁핍했던 탓일까. 외모만 보고 밀어붙였던 결혼, 그의 신부는 병기씨가 생각했던 아내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울증 증세를 보이던 아내는 아이들을 심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아내의 과거가 복잡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고 나서 병기씨는 일중독에 알콜중독을 덤으로 얻었다. 그의 선택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배신감이 컸어요. 저는 어떻게 풀어야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죠. 그 블랙홀처럼 커지는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서였는지 허세만 늘어갔어요. 돈을 벌면 버는 대로 골프를 치러 다니고 술에 취해 새벽이 돼서야 집에 들어갔죠.
어느 지역의 시장 말만 믿고 샀던 땅이 시장이 재선에 실패하자 땅값은 똥값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는 사이 직원 하나가 회사 돈을 횡령하는 사건이 생기고, 아내가 바람이 나서 가게 돈을 빼내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빚을 저에게 안겨줬죠.
모든 게 제 잘못이었죠. 제 선택에 의한 거였고, 제 선택의 결과를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자는 생각에 아이들만 데리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누구나 실패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패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빈털터리 홀아비 신세로 아이들을 키우며 절치부심하던 병기씨는 아이들을 위해 매일 요리를 하며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고 새로운 선택을 시작했다.
2004년이었어요. 일도 줄이고 술도 줄이고 그저 평범한 아버지로만 살아가자 했던 제가 충무로 인쇄골목에 있는 거래처에서 한 여자를 만났죠. 작은 인쇄소에서 손님 하나하나를 따듯한 미소로 응대하고 누가 보지 않아도 묵묵히 제 일에 열심이던 그 여자가 어느 순간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그 행복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뭔가 뿌듯하게 가슴을 채우더라고요. 그런 열망이 생기니까 일에 대한 열정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죠.
충무로 인쇄 골목,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믿음직한 일꾼처럼 하청 받은 작은 일들을 알뜰히 해내는 곳이었던 어느 인쇄소에 작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명함 하나만 파달라고 말하고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인쇄물 영업에 뛰어든 병기씨가 관공서 하청을, 서울이 아닌 지방의 학교들에서 보내온 주문을 흥부네 박씨처럼 물어왔다. 그리고 병기씨는 새로운 인쇄소를 차렸다. 성실한 여직원과 영업의 귀재가 운영하는 부부 인쇄소가 되었고 부부 인쇄소 매출은 열 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변하게 된다는 말이 있죠. 아마도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 게임하듯 모든 선택을 해온 것 같아요. 굴욕에 맞서고 모험에 도전하고 사랑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외로워지고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또 다른 자유를 찾게 된 건 지금의 제 아내 덕분이죠. 재혼은 제게 힐링이었습니다.
또 다른 자유,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가 존재할 수 있을까?
김병기 대표는 인간의 자유가 자기가 만들어낸 규율 속의 자유라고 말한다. 내가 만들어 낸 규율. 그것을 찾다보면 만들다 보면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어있을지 칠순 잔치에서 장성한 자식들을 보며 이제는 내 자유를 찾고 싶다 말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김병기 대표가 찾은 자유 속의 규율은 무엇일까?
충무로가 예전 같지 않아요. 한마디로 ‘위기’죠. 하지만 저는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어서 위기를 이겨내고 있어요. 충무로 인쇄 골목의 돌파구를 어떻게든 찾아내야죠.
오더를 준 업체에서 감사패도 받았고 그리고 지금은 아들과 함께 고급 카페 사업도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뭔가 힐링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아들이 지금은 그냥 직원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사업 파트너가 돼주면 좋겠네요.
제가 누리고 있는 자유란 이제는 그런 것 같아요. 함께 누리는 자유 같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자유가 아니라 내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집착이나 욕심 같은 거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가 보이더라고요. 함께 열심히 일하고, 성과는 다르지만 만족을 나눌 수 있는 마음, 상대가 편해질 때 내가 편해질 수 있음을 아는 마음의 자유?
지나온 시간들에 미련과 후회도 남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는 김병기 대표. 그가 선택한 자유에는 확실히 그 만의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고 좌절과 성공이 함께 있어야 선택의 가치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청년들에게 멘토가 되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말한다.
김승철(25세, 김병기 대표 아들) :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청년들 중에 하나가 바로 저입니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저에게 많은 변화를 줬어요. 내 돈벌이를 위해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제 성격에 맞는 일을 하기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죠. 카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제게 재산을 물려주실 분도 아니고요. (웃음) 적은 돈을 벌지만 노동의 가치를 배우고 사람들을 많이 대하면서 저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어요. 아버지를 능가하는 사업가가 되는 게 목표예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김병기 대표는 수시로 거울 앞에 서며 자신의 스타일을 점검한다.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고 자극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그는, 아들과 함께 중저가 매장에서 같이 옷을 고르고 영화를 보러갈 계획이다. 구두닦이 시절 동시상영관에서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며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영화를 제작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김병기 대표의 선택이고 그만의 자유다.
요즘도 책을 펼쳐들면 가끔씩 바람이 일고 노래가 들려와요. 나한테만 들리는 노래가 있죠. 앞으로도 제 삶은 저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죠? 선택에 따라 경제적으로 가난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저는 결과에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선택한 결과에 대한 빚을 스스로에게 갚으며 살아가는 거죠.
글 정영배 감독, 사진 김장훈 PD· 전용재 여행전문기자
e뉴스팀 e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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