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동등한 이들을 다르게 대하는 것도 정의롭지 못하고 동등하지 않은 이들을 똑같이 대하는 것도 정의롭지 못하다고 했다. (Injustice arises when equals are treated unequally but also when unequals are treated equally) 즉 차별도 옳지 않지만 차이의 불인정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 같으나 개념적, 실천적으로 비대칭적인 문제다.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 '다름'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의지의 문제인데 비해, 차이는 존재하는 '다름'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호기심의 문제다.
과학에서 차별과 차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잘 보여주는 예가 여성과학자 문제다. 지난 수십년간 여성의 경제 활동과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판사, 의사, 외교관 등 전통적인 남성 우세 직종에 여성 진출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과학기술로 눈을 돌리면 분야마다 좀 다르지만 이공계 여성 전공, 종사자는 여성에 대한 적극적 차별이라고 보기엔 그래도 좀 있는 편이고 남녀간 '차이'의 적극적 인정이라고 보기엔 한참 모자라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로렌스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은 여성과학자에 대한 '차별'적 언급으로 총장직에서 물러났는데,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2005년 미국 최대 경제연구조직으로 수많은 노벨경제학 수상자들이 겸임연구자로 활동하는 NBER에서 '이공계 인력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콘퍼런스를 열었다. NBER에서는 서머스에게 연구중심대학의 다양성 증진 정책에 대해 소개해줄 것과 패널 토론을 자극할 수 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도록 부탁했다. 강연에 나선 서머스는 첫째는 생략하고 둘째에 집중해 소위 엘리트 대학의 이공계 정년직에 여성이 적은 이유로 세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첫째는 고위직 가설로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가정을 거의 내팽개쳐야 하는 전면적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성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키, 몸무게, 체력 등 인간의 여러 특질에 남녀 간 차이가 존재하듯이 수학, 과학 능력에서도 남녀 간 차이가 난다는 선천적 특질 가설이다. 셋째는 사회적 차별 가설로 사회화 과정과 문화적 편견, 직장 고용 등에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차별로 여성이 적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듣기에 매우 거북한 게 사실이다. 전국 신문과 온라인상에서 여성이 선천적으로 수학, 과학에 열등하다고 주장한 서머스 총장에 대한 맹비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가설은 와전된 것이었다. 두 번째 가설의 '차이'는 남녀 간 특질 비교에서 잘하고 못하고 '수준'이 아니라 '범위'의 차이였다. 즉 수학, 과학 능력이 남자들은 아주 못하는 사람과 아주 잘하는 사람의 분포가 여자에 비해 더 넓다는 가설이었다. 따라서 그 분포의 다양성이 실제 존재하는지 또 존재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과학기술계 여성 과소대표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지 검증해볼 만한 그야말로 '가설'이었다.
근대과학이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남성의 과학이었다는 반성으로 과학기술 발전에서 여성의 역할과 몫에 대한 담론과 정책은 오랫동안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소수자 보호' 차원에서 이뤄져왔다. 그러나 여성은 인구의 절반으로 소수가 아니며,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과학은 차별만이 아니라 '차이'의 관점에서 숙고할 만한 구호이다.
예컨대 임상실험에서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더 미세하게 고려하거나 교과서에서 흔히 정자가 난자를 뚫는 것으로 묘사되는 수정 현상이 실제로는 오히려 난자가 정자를 흡입하는 형태임을 주지시키는 것 등 젠더 관점에서 찾아내야 할 '차이'는 무궁무진하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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