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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사인암엔 고려의 천재가 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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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52)

[千日野話]사인암엔 고려의 천재가 있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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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참상이라 할 만합니다."
"종이 공납도 200여권을 해내야 하고, 노루 칠십 마리와 꿩 이백 마리도 대야 하지만 노약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워 곡식을 털어 노루와 꿩을 사서 바쳐야 하는 실정이지요. 병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40명이 채 되지 않는데, 그중에 열은 빈 문서만 걸어놨을 뿐, 사람의 실체가 없으니 전쟁이라도 나면 죽령의 관방은 뚫릴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비참을 극한 고을의 상황을 얘기하며 다시 눈물을 머금은 퇴계에게, 공서는 말했다.
"이토록 고통받고 있는 고을의 수령을 맡아,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을 짐작할 만합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 파악하시면서도, 백성들을 위로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속으로 깊이 고민하시는 사또의 심중을 이젠 헤아릴 듯합니다."
"이토록 산과 물이 아름다운 고을에서 오직 사람들만 고통받고 있는 현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깝습니다."
"조정에 상소를 하여, 이 참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보고하시고 공물과 부역을 몇 년 만이라도 면제를 해주도록 하여, 그동안에 백성들이 자립 자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혹시 고을이 살아날 계기가 되지 않을지요?"


퇴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공서의 말이 지당하고 지당하오. 하지만 지금 조정이 어떤 상황입니까? 서로 으르렁거리는 정략정치에 매몰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역의 공출이 줄어드는 상소를 올린다면 저들의 먹잇감만 되지 않겠습니까? 나 또한 그런 상소를 끝없이 고심하였으나,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괴로움을 삭이며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허어. 참으로 지방 수령하는 일이 형벌만큼이나 고행임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스스로 자청한 일이니, 절망에 매몰되지 말고 끝까지 백성들이 자구책을 찾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공서가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퇴계의 술잔에 가만히 술을 따랐다.

며칠 뒤, 퇴계는 공서, 두향과 함께 선암(仙巖)계곡 쪽으로 올랐다. 사인암 서벽정(棲壁亭)에서 이지번 형제와 만나기로 하였다. 사인암은 단양군의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 기암절벽으로 운계의 북쪽 들판과 선암 사이를 산과 물이 가로막아 동서로 깊은 골짜기를 이룬 곳이다.


사인암(舍人巖)이란 지명은 고려 충선왕 때의 성리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ㆍ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때 이곳에 머무른 사연을 따서,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재광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우탁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단양이 낳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가 원나라에 갔을 때 중국의 학자였던 정관이란 사람이 우탁의 역학(易學ㆍ주역)에 대한 식견에 놀라 "우리가 논하는 주역은 동쪽에 이미 있었다(吾易, 東而已)"라고 말했다. 정관의 이 말은 이후에 그의 별호가 되었는데 그것이 역동(易東)이다. 퇴계 이황도 뛰어난 선배인 우탁에 대해서 각별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사인암 모임을 가진 지 22년 뒤인 1570년 퇴계는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서원을 건립하는 일을 발의한다. 현재 안동대학교 박물관 뒤편에 있는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서원은 역동서원이라 부른다.


우리는 우탁의 시조 하나를 기억한다. 늙음을 한탄한 '백발가'이다.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 시조는 생생한 은유와 풍자로 후세 사람들에게 인생무상을 각인시켰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이 좋아했던 우탁의 시는 사인암의 풍경을 읊은 '강행(江行)'이란 시였다. 두향은 말했다.
"단양 사람들은 역동선생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학자로서도 뛰어난 분이시지만 시인으로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합니다. '강행'은 이곳의 식자(識者)나 풍류가라면 누구나 읊는 명시(名詩)지요."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민초를 생각하며 퇴계가 울었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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