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지난 18일(한국시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400명이 넘었다. 러시아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15일 미국과의 경기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 때문에 졌다고 생각한 러시아 팬들이 분노한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과의 아이스하키 조별리그에서 2-2로 맞선 상황에서 결정적인 골을 넣었다. 러시아의 페도르 튜틴이 골망을 갈랐지만 심판은 미국 골대가 원위치에서 벗어났다며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결국 승부치기 끝에 미국에 2-3으로 패했다.
블라디미르 푸틴(62)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경기장을 찾아 관전한 이 경기는 미국과 스웨덴 심판 둘이 맡았다. 심판 중 한 명이 상대였던 미국인이라는 점이 러시아 팬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러시아 팬들은 미국인 브래드 마이어를 겨냥해 "심판을 비누로 만들어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했다.
아이스하키는 동계스포츠 유일한 구기종목이다. 대회 흥행을 좌우하는 실질적 메인이벤트다. 2006년 토리노 대회 때 아이스하키 총 관중수는 전체 관중의 38.2%를, 2010년 밴쿠버 대회 때는 48.6%를 차지하기도 했다. 동계올림픽 폐막식은 아이스하키 남자 결승전이 끝난 직후 열린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모든 티켓이 매진됐고,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운영하는 중고 사이트에서도 티켓은 씨가 말랐다. 사설 거래사이트에서 최대 5760달러(약 620만원)에 암표가 팔리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당초 결승전 티켓 가격이 3만4000루블(약 106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6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유럽의 축구경기를 전쟁에 비유하지만 아이스하키에서 미국-러시아의 경기는 전쟁과 다름 없다. 냉전시대 동서 진영의 우두머리였던 초강대국으로서 라이벌 의식이 팽팽한 데다 경기의 특성 자체가 몸싸움이 잦고 격렬하다.
더구나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 미국에 진 빚이 있다. 미국 아이스하키가 전설로 간직한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대첩'이다. 1964년 인스부르크 올림픽 이후 4연속 우승을 기록 중이던 소련은 당시 대학선수들로 맞선 미국에 3-4로 져 금메달을 내줬다. '다윗'이 '골리앗'을 잡은 이 대결의 이야기는 훗날 영화(2004년작 '미라클')로 제작됐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굴욕의 역사다.
동구 해체 전, 미국은 올림픽에서 8차례나 우승한 아이스하키 세계 최강국 소련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미국과 캐나다가 주축을 이룬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수준이 높았다. NHL 일정 때문에 스타급 선수들이 대부분 빠지는 세계선수권대회와 달리 올림픽의 아이스하키는 전세계 슈퍼스타들이 모두 참가하는 진검승부의 무대다.
미국을 이기기 위해 푸틴 대통령은 2008년 벨로루시 등 동유럽 8개국 클럽이 참가하는 콘티넨탈하키리그(KHL)를 만들었다. 푸틴 대통령은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 전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과 함께 아이스하키 친선경기에 직접 출전할 정도로 아이스하키를 좋아한다.
조별리그에서 미국이 이겼지만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팀은 나린히 8강에 올랐는데, 준준결승에서 러시아는 핀란드와 대결한다. 여기서 이기면 스웨덴-슬로베니아 경기의 승자와 결승 진출을 다툰다. 반면 미국은 준준결승에서 체코, 4강전에서 캐나다-라트비아 경기의 승자를 이겨야 한다.
대진표는 러시아가 유리하다. 외신은 이변이 없는 한 결승까지 갈 것으로 본다. NHL에서 '득점기계'로 통하는 알렉산더 오베츠킨(29ㆍ워싱턴 캐피털스)은 러시아의 희망을 짊어진 간판스타다. 미국은 준결승 상대로 유력한 캐나다를 돌파해야 한다. 아이스하키 종주국이자 '디펜딩챔피언' 캐나다는 올림픽 2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시드니 크로스비(26ㆍ피츠버그 펭귄스)가 캐나다의 에이스다.
미국과 러시아의 매치업이 실현된다면 이번 대회 최고의 빅 이벤트가 될 것이다. 결승전은 23일 오후 9시 볼쇼이 아이스돔에서 열릴 예정이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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