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자전적 에세이 출간
![[Book]한국공연사 50년을 담았다…'공연의 탄생'](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4011712595197406_1.jpg)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이 책은 제가 평생 무대 뒤에서 만난 사람들과 쌓아온 인연의 기록물이자, 무대에 관한 탐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50년간 문화예술계에서 일하면서 500여편의 공연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 땀내 나는 이야기가 공연예술의 역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출간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신간 '공연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 공연의 현대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바로 국내 공연장 역사의 산증인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이다. 이 사장은 1963년 문화공보부 예술과 공무원을 시작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88서울예술단을 비롯해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등 국내 대표 예술기관을 운영했다. 올해 여든을 맞이한 저자는 "한 편의 연극처럼 훌쩍 지나간" 50년의 기억을 반추해 그 뒷이야기를 풀어낸다.
저자가 공연장 CEO로 있을 당시, 무대에 올린 작품은 약 500여편이 된다. 이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의 에피소드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물어봤더니 저자는 1974년 11월22일 미국 제럴드 포드 대통령 방한 당시 진행된 특별공연 얘기를 꼽았다. "포드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이렇게 양국 정상을 모시고 만찬과 함께 특별공연을 펼쳤습니다. 근데 잠깐 동안 정전사고가 일어났어요. 정전이 복구되고 다시 불을 켰더니, 그 짧은 순간에 포드 대통령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 대통령 자리에는 가짜 포드 대통령이 앉아있었습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고요. 미국과 우리의 국빈 경호의 격차를 실감한 아찔한 사건이었죠."
'예술경영'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 이종덕 사장은 "재정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도전 정신과 긍정적인 마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제1원칙으로 세우고 이를 고수해나갔다. 1995년 예술의전당 사장 재직 시절에는 공연장에 입주해있는 음식점 관계자들에게 결혼식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법정 소송까지 간 끝에 승소했다. 당시 문화공간에서 상시로 결혼식이 열리는 바람에 공연장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관객들이 불편을 겪게 되자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개관하기 전부터 CEO를 맡았던 성남아트센터의 경우, 뮌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러시아 벨라루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등의 공연을 유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2001년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조명장비 과열로 화재가 발생했을 때입니다. 회의 중에 CCTV를 통해 발화순간을 목격했고 다행히 인명피해 없이 관객들을 대피시켰습니다. 그러나 물대포 세례를 받은 무대와 각종 장비들을 말리고 복구하느라 밤샘 작업을 했던 해프닝을 겪었죠. 또 새로운 천년을 맞는 1999년 12월31일 저녁 8시부터 열린 세종문화회관 제야음악회 공연도 기억에 남습니다. 공연을 관람한 720명 관객들을 서울역에서 전세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가게 하는 이벤트를 준비했는데요. 1박2일의 여행을 곁들인 제야음악회는 지금까지도 아주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이종덕 사장이 문화공보부 시절부터 현재까지 인연을 다져 온 문화예술인들 역시 수없이 많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이종덕 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1998년 '까멜리아 레이디'의 '마르그리트' 역을 맡아 다음해 '브누아 드라 당스 최우수 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강수진은 "'까멜리아 레이디'를 고국에서도 선보일 수 있게 추진한 것이 당시 이종덕 세종문화회관 사장이었다"며 "객석 4000석이 연일 가득 차는 것을 보고 함께 공연한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단원들도 놀라워했다"고 회상한다. 연극배우 박정자는 저자에 대해 "공연이 끝나면 매번 빠지지 않고 분장실까지 찾아와 격려해주고 갔다"고 말한다.
또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과의 일화도 유명하다.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당시 스무살이었던 정명훈 감독이 입상하자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카퍼레이드를 열게 했던 사람이 바로 이종덕 사장이다. 정명훈 감독은 "카퍼레이드는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허용되던 국가 이벤트였는데, 그 특별했던 퍼레이드가 나에 대한 관심과 클래식의 위상을 단번에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날 국민들이 보내주신 응원에 힘입어 변방의 젊은 예술가가 세계 무대에서도 주눅들지 않을 용기와 배짱을 얻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문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비결을 묻자 저자는 답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이건 일터에서 만나 선후배, 동료건 한번 인연을 맺으면 끈끈할 정도로 오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습니다. 한번 가까워지고 일단 정이 들면 그 사람이 나를 버릴 때까지 교유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서는 성공도 할 수 없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 공연 역사가 어떻게 진행돼왔는지 그 변천사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마지막 장에는 김승업 영화의전당 대표, 김의준 국립오페라단 단장 등 5명의 예술경영 CEO들과의 인터뷰도 수록돼있다. 부록으로 실린 '공연장 CEO시절의 공연들' 목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역사다.
(공연의 탄생 / 이종덕 / 숲 / 1만8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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