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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스토리인물史]先明後暗의 황제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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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스토리인물史]先明後暗의 황제 현종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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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玄宗, 685∼762년)은 6대 황제로 그가 구현한 개원의 치(開元之治)는 훌륭한 정치의 전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말년에는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져 안사의 난을 초래해 왕조의 몰락을 재촉한 비운의 황제다.


본명은 이융기로 측천무후의 셋째 예종의 삼남이다. 무측천이 장간지의 거사로 퇴위하고 중종이 복위되자 예종은 상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이 부인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에 의해 타살되는 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사직의 회복을 꾀한다'는 명분하에 그들을 제거하고 예종을 제위에 옹립한 후 황태자가 되었다. 28세 예종의 양위로 즉위한 후에는 고모 태평공주 일파를 숙청하여 개원성세를 열었다.

현종의 초기 치세는 확실히 뛰어났다. 공신을 제거하여 약화된 왕권 강화에 성공하였다. 왕거, 유유구, 최일융 등 공신을 지방으로 좌천하거나 지위를 강등시켜 권부에서 내쫓았다. 실세인 왕거를 지방으로 내쳐 세도정치의 폐해를 근절하였다. 다음으로 훌륭한 중신을 재상으로 발탁해 국정의 효율화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요숭은 이미 두 차례 재상을 역임한 원로로 10개 정치개혁방안을 제시하고 국정의 쇄신에 올인하였다. 봉급만 축내는 무능한 관리를 정리하였다. 난립한 절과 도교사원을 정비하고 승려들을 환속시켰다. 적극적인 이재민 구호정책을 펴는 등 경제회복에 노력하였다. 그는 "때를 잘 아는 재상"으로 명성을 얻었다. 후임인 송경은 무측천 시대 측근 장역지의 전횡에 과감히 맞섰던 강골이었다. 요숭의 정책을 지속하여 국정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덕정을 베풀어 '따뜻한 선정을 펴는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장열은 몇 차례 좌절과 재기를 반복한 풍운아로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중서성과 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통합하여 행정의 효율성을 높였다. 군인을 20만명 줄이고 토지제도를 정비해 관료들의 중간착취를 억제하였다.


개원성세도 현종이 정치를 멀리하고 왕족인 이임보를 장기간 재상으로 기용하면서 서서히 기울어갔다. 그는 "입에 꿀이 있고 뱃속에 칼이 있다"는 말처럼 겉과 속이 다른 냉혹한 권력자였다. 자신의 정적은 반드시 제거하였다. 라이벌을 없애기 위해 외국인 출신을 지방의 절도사로 발탁한 것이 안사의 난을 초래한 주된 원인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파국은 양옥환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744년 이임보에게 정무를 일임하고 양옥환을 귀비로 봉하였다. 751년 안록산이 평로, 범양, 하동 3도의 절도사를 겸하여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군왕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양귀비 총애는 날로 커져갔다. 안록산은 외국인 혼혈인 잡호 출신이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200킬로에 달하는 비만으로 불룩한 배를 본 현종이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는 물음에 "오직 일편단심 뿐입니다"라고 답할 정도로 아부에 능하였다. 양귀비의 의붓아들을 희망하고 궁중에 들어오면 양귀비에게 먼저 인사하면서 "야만인은 어머니에게 먼저하고 아버지에게는 나중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임보 사후에 재상이 된 양국충과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안록산은 755년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하북지방에서 거병하였다. 자치통감은 '안록산은 수레에 몸을 싣고, 앞뒤로 보병과 기병의 정예군을 당당하게 따르도록 했다'며 난의 시작을 생생히 묘사했다. 낙양이 함락된 후 당은 수도 장안 외곽 동관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고선지, 봉상청 등 유력 장수를 배치하였지만 방어에 실패하였다. 현종은 장안을 탈출하여 서쪽 120리 떨어진 마외역으로 도망쳤다. 재상 양국충과 양귀비가 여기서 죽임을 당한다. 양귀비는 신하들의 압력에 못 이겨 환관 고역사에 의해 목이 졸려 죽는다. 현종은 아들 숙종에게 양위한다. 7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당 왕조의 승리로 끝났지만 양귀비가 떠난 삶은 현종에게는 공허한 것이었다. 762년 80세의 나이로 죽는다. 현종의 치세는 성당(盛唐)의 봄을 활짝 피운 공적보다 당의 몰락을 재촉한 책임이 더 무겁다 하겠다. 처음에는 현명했지만 나중에는 우매해진 대표적 지도자다.


박종구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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