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베르나베우의 90분은 정말 길다."
1984-85시즌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 직후 레알 마드리드의 간판 공격수였던 후아니토가 남긴 말이다. 당시 레알은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적 같은 역전승을 수차례 일궈내며 정상에 올랐다.
레알은 대회 3라운드 1차전 원정에서 안더레흐트에 0-3으로 패한 뒤 홈 2차전에서 6-1 대승을 거둬 8강에 올랐다. 준결승도 마찬가지였다. 인터 밀란과의 원정에서 0-2로 지고도 안방 2차전을 3-0으로 마무리하며 결승티켓을 따냈고,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다.
후아니토의 정의는 이듬해 또 한 번 사실로 증명됐다. 레알은 1985-86시즌 대회 3라운드 1차전 원정에서 묀헨글라드바흐에 1-5로 지고도 2차전에서 4-0으로 이겨 원정다득점에 의해 8강 진출에 성공했다.
17년 만에 레알 마드리드는 '역사 재현'을 꿈꾼다. 5월 1일 새벽(한국시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리는 도르트문트와의 UEFA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 홈경기다. 앞선 1차전 원정에서 1-4로 대패한 레알은 3-0 혹은 네 골 차 이상으로 승리해야 결승에 오를 수 있다.
말 그대로 기적이 필요한 상황이다. 1992년 챔피언스리그 출범 이후 본선 토너먼트에서 1차전 1-4의 결과가 뒤집힌 것은 단 한 차례뿐. 데포르티보는 2003-04시즌 대회 8강에서 AC밀란에 원정 1차전을 1-4로 진 뒤, 안방에서 4-0으로 승리해 원정다득점에 의해 준결승에 올랐다. 아직까지 '챔피언스리그 3대 기적'에 꼽히는 결과다.
레알은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75-76시즌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 더비 카운티와의 2라운드 1차전 원정에서 1-4로 지고도 홈에서 5-1로 승리해 대역전을 일궈낸 바 있다. 하지만 당시는 상대팀과 전력 차가 큰 대회 초반이었던 반면, 지금은 경쟁이 더 치열해진 챔피언스리그의 준결승전이다.
무엇보다 상대팀 도르트문트가 만만치 않다. 도르트문트는 이번 대회 유일의 무패(7승4무)를 자랑하는 팀. 원정에서도 1승4무(9득점6실점)로 선전했다. 특히 조별리그에선 이미 레알을 상대로 1승1무를 거뒀다. 홈에서 레알을 2-1로 제압한 뒤, 원정에서도 2-2로 비기며 판정승을 거뒀다. 덕분에 '죽음의 D조'를 1위로 통과하는 개가도 올렸다. 다시 레알과 맞대결을 펼친 준결승 1차전에선 로베르토 레반도프스키가 네 골을 융단폭격하며 4-1로 완승했다.
상성도 좋지 못하다. 다득점을 위해선 빠른 템포의 공격적인 경기 운영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것이야말로 도르트문트가 가장 원하는 대응이란 점. '꿀벌 군단'이란 애칭에 걸맞게, 벌떼 같은 강한 압박과 엄청난 활동량을 바탕으로 경기 운영을 펼친다. 같은 방식으로 나선 상대는 누구보다 잘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레알로서는 자칫 도르트문트의 흐름에 말려들어갈 위험이 큰 셈이다.
자연스레 해외 베팅업체들의 예상도 비관적이다. 도르트문트의 결승 진출 배당률은 1.2배~1.3배, 반면 레알에겐 4.8배~5배가 매겨졌다. 우승 배당률 역시 바이에른 뮌헨 1.6~1.65배, 도르트문트 2배~2.5배인데 반해 레알은 7~10배에 달한다. 29~34배의 바르셀로나보다는 나은 수치지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정인 셈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레알은 후아니토의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다. 조세 무리뉴 레알 감독은 경기 하루 전 열린 기자 회견에서 "우리 팀 선수들 모두 후아니토의 역사와 정신을 알고 있다"라며 "축구에선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세르히오 라모스 역시 "선배들로부터 '베르나베우의 90분은 정말 길다'란 얘기를 수차례 반복해 들었다"라며 결의를 다졌다.
안방에서만큼은 독일팀에 강한 면모도 위안거리다. 레알은 유독 독일 원정에선 1승6무17패로 힘을 못 썼다. 유일한 1승은 무려 13년 전 레버쿠젠과의 조별리그 경기(3-2 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홈에선 17승4무2패로 압도적으로 강했다.
'에이스'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는 최근 당한 근육 부상을 털고 축구화 끈을 질끈 동여맸다. 그는 현재 12골로 대회 득점 선두에 올라있으며, 이번 대회 도르트문트와의 세 차례 맞대결에서도 두 골을 넣었다. 베르나베우의 90분이 기적 완성에 충분한 시간인지는, 전적으로 그의 발끝에 달렸다.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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