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90년대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와 같은 국제종합경기대회를 취재할 때마다 ‘왜 우리나라 대표 선수단은 기자회견을 하지 않을까’란 의문이 들곤 했다. 제법 큰 규모의 선수단들은 대부분 대회 직전이나 초반 취재진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내용은 ‘자기소개’ 정도였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대회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본 선수단 단장이 메인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가진단 소식을 전할 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나라가 그런 자리 없이 경기에만 열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는 ‘당시만 해도 한국이 스포츠 후진국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을 한다. 경기력은 세계적 수준에 다가서고 있었으나 스포츠 외교 등 경기 외적인 면에선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었단 이야기다.
요즘 체육계 인사들을 만나면 경기단체 회장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큰 화제다. ‘낙하산’ 또는 ‘떠넘기기’가 대부분이었던 이전과 달리 경선이 자리를 잡았다. 인기 종목이다 싶은 단체장 경선은 양자 대결은 기본 4파전 이상의 흥미진진한 레이스를 빚어낸다. 정치인, 기업인, 경기인 등 후보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오는 28일 대한축구협회장 선거를 끝으로 대부분의 경기 단체장 선거는 마무리된다. 대단원의 막은 다음달 22일 예정된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장식한다.
한국이 1990년대 이후 동·하계 올림픽 성적 기준으로 세계 톱10의 자리를 굳히면서 대한체육회장의 위상은 자연스레 올라갔다. 자리는 국내 아마추어 스포츠의 총본산인 대한체육회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국가올림픽위원회(NOC)의 수장이기도 하다. NOC를 이끌려면 국내용이어선 안 된다. 세계 스포츠계 흐름을 꿰뚫어 보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과 스스럼없이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2011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은 독일 뮌헨을 제치고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투표를 이틀 앞뒀을 때 뮌헨유치위원회 쪽에선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발견됐다. 독일의 축구 영웅 프란츠 베켄바워가 뮌헨유치위에 합류한단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히든카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평창 쪽에선 끝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뮌헨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토마스 바흐 유치위원장은 IOC 부위원장으로 오는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는 제125차 IOC 총회를 끝으로 물러나는 자크 로게 위원장의 뒤를 이을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펜싱 플러레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1984년 사라예보,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2연속 우승자인 카타리나 비트는 IOC 위원은 아니지만 이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지녔다. 독일의 또 다른 IOC 위원인 클라우디아 보켈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펜싱 에페 여자 단체전 은메달리스트다.
안시를 내세웠던 프랑스는 IOC 위원 모두가 올림픽 메달리스트다. 장 클로드 킬리는 1960년대 세계 최고의 스키 선수로 1968년 그레노블 동계올림픽 대회전, 회전, 활강 등 스키 전관왕에 올랐다. 또 한 명의 IOC 위원인 기 드뤼도 주목할 만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육상 110m 허들 금메달리스트로 은퇴한 뒤 기업인,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냈다.
이번에 뽑히는 대한체육회장은 친화력이면 친화력, 대외 경쟁력이면 대외 경쟁력, 인지도면 인지도 거기에 언어 능력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겠다. 좁은 국내 무대에서 개인적인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인물이 대한체육회장 자리에 올라선 안 되겠다. 한국 스포츠의 위상은 더 이상 그런 수준이 아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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