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의 신작 <남영동1985>에는 장관이 된 김종태(박원상)의 주름 진 두 눈이 화면을 응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난 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렇게 외면하고 싶은 정도로 어두웠던 우리의 과거를 소환해 질문을 던진다. 가족들과 목욕탕을 다녀오던 민주화운동가 김종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두한(이경영) 등에게 고문을 받는 모습은 지켜보기 힘들만큼 고통스럽지만, 피할 수만은 없는 또 하나의 현실이기도 하다. 제 17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그 현실을 전하러 온 정지영 감독과 배우 박원상, 이경영, 명계남(박전무 역), 서동수(백계장 역), 김중기(이계장 역)를 부산에서 만났다.
<#10_QMARK#> <부러진 화살>에 이어 두 번째로 실존 인물을 다뤘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
정지영 감독: 사실 연속으로 실제 인물을 다룬 건 우연이었고 BIFF에 오게 된 건 완성 시기가 맞았기 때문이다. 고문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다. 특히 가해자를 그리고 싶었는데 마침 <부러진 화살> 개봉 직전에 김근태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나 그의 수기를 우연히 보게 됐고 이걸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아웃사이더가 사회를 보는 관점으로 영화를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도 마찬가지 이유로 작업했다.
<#10_QMARK#>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이유가 뭔가.
정지영 감독: 모든 나라가 그렇겠지만 한국의 현대사는 특히 격동의 시간이었다. 고문이나 비인간적인 행위는 여러 나라에서 언제나 있어왔지만 현재 한국 국민들은 고문이 있었다고만 생각하지 그게 어떤 고문이었고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는 모른다.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많은 국민들이 공유하길 바랐다. 피상적으로 아는 것 말고 그 아픔을 함께 할 때 나라를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꼭 고문만이 아니라 현대사의 암울한 점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영동1985>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용서”
<#10_QMARK#> 그 암울함을 관객들이 편안하게 공유하긴 힘들 것 같다. 김종태가 고문 당하는 장면, 힘들어하는 모습이 주는 심리적 고통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
정지영 감독: 내가 묘사하는 고문을 보고 관객들이 실제 고문을 받은 사람들처럼 아파할 수 있을까, 이게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었다. 하지만 실제 촬영을 하면서 스스로가 너무 고통스러웠고 그 고민은 사라졌다. 어차피 영화니까 힘들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영화를 30년 동안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힘들었다. 내가 아파한 만큼 관객들도 아파할 것 같고 만약 관객들이 실제로 그렇게 고통을 느끼신다면 영화를 잘 찍었다는 방증일 거다.
명계남: 현장에서 감독님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스태프와 배우들도 함께 느꼈다. 그래서 배우들끼리 일부러 웃고 떠드는 자리도 만들어봤지만 힘들더라.
<#10_QMARK#> 고문을 당하는 연기, 하는 연기 모두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캐스팅 제의를 받았고 출연을 결정했나.
박원상: <부러진 화살> 홍보 일정 때문에 감독님과 라디오 방송을 하러 갔다가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 말씀을 듣고 서점에 가서 <남영동>을 사서 읽었는데 쉽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찍으시려고 하는 걸까’ 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감사하고 반가웠다. 물론 <부러진 화살>에 이어 배우로서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 하지만 스태프, 배우들에 대한 믿음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이경영: 배우가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감독님과의 20년 인연이 주된 계기였다. 그리고 보통 캐릭터를 볼 때 ‘왜 이 인물이 이렇게 됐을까’ 라는 연민으로 접근해 왔는데 이두한에게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걸 느꼈다. 연민보단 완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거다. 그래서 무엇보다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진 캐릭터로 표현하려고 했다. 고문 장면을 찍는 내내 난 즐거웠다. (웃음) 연기도 상대 배우를 배려하기보다 무자비하게 했고 5차 편집본을 보면서 좀 더 해도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10_QMARK#> 박원상은 용서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김종태를 연기했는데 어떤 심정으로 임했는지 궁금하다.
박원상: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용서라고 생각한다. <남영동>에도 ‘용서는 인간의 몫인가’ 라는 말과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대부분 감독님의 디렉션을 받으며 연기 했지만 확실히 쉽진 않았다.
“거의 모든 고문 장면을 사실과 같을 정도로 촬영했다”
<#10_QMARK#> <남영동>을 쓴 김근태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나 취재하는 과정이 힘들진 않았나.
정지영 감독: 이 작품은 분명 故 김근태 상임고문의 이야기이지만 극 중에선 김종태란 이름을 썼다. 비단 한 사람의 이야기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여러 고문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영화 엔딩에도 그 분들의 이야기가 짧게 나갔지만 실제 인터뷰는 훨씬 길었다. 취재를 하면서 피해자 분들의 치유 과정도 함께 경험했고. 그 분들의 많은 증언은 영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고문 장면 연출은 이런 수많은 증언과 수기를 반영했다.
<#10_QMARK#> 이두한이나 박 전무 밑에 있는 여러 계장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일상적인 회사원처럼 그려져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서동수: 이 영화에 참여하기 전 감독님으로부터 인물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촬영 들어간 이후에도 김 계장을 연기한 이천희나 이 계장 역의 김중기와 그 부분에 대해 논의했다. 그래서 정리된 것 중 하나가 바로 ‘폭력이 일상적으로, 무심하게 자행되면 공포가 더 증폭되지 않을까’ 였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며 연기를 했고 아무래도 소재나 주제가 명확한 작품이니까 그런 다양성과 영화의 볼거리가 여러 계장들을 통해 표현되길 바랐다.
김중기: 상사들과 달리 계장들은 김종태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당시 모든 수사관들이 이두한이나 박 전무처럼 고문을 하진 않았을 것 같단 생각도 했다.
<#10_QMARK#> 천으로 얼굴을 덮고 그 위에 물을 뿌리거나 맨 얼굴에 고춧가루를 탄 물을 붓는 등의 고문 장면을 어떻게 촬영했는지 궁금하다.
박원상: 대부분의 고문을 실제로 재현했는데 촬영 전에 감독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원래 체력이 좋습니다. 지치지 않는 체력 하나만 갖고 현장에 가겠다고. 고문 기구 칠성판 위에서 사지가 묶여있으니까 의사표현이 마땅치 않을 테니 버티다 정 힘들면 몸을 거세게 흔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아주 안 매운 고춧가루를 선별해 오미자 가루를 섞는 등 방법을 찾아갔다. 사실 촬영하면서 우연히 알아낸 가장 중요한 촬영 방법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선 그 비밀을 말씀드리기 힘들 것 같다. (웃음) 나중에 정식 개봉한 후 많은 관객들이 질문하시면 어쩔 수 없이 그 때 말씀드리겠다.
이경영: 전기 고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건 사실과 같을 정도로 촬영했다. 이두한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실제 물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중간 중간 김종태가 아닌 실제 박원상이 못 참겠다고 하는 게 보일 땐 중단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꿋꿋이 했다. 박원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문 받는 걸 즐거워하고 새로운 걸 기대하는 것 같았거든. (웃음) 그래도 컷 하는 순간 다른 배우들과 함께 박원상한테 마사지도 해주고 잘 챙겨줬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작품을 만드는 건 감독의 보람”
<#10_QMARK#> 아직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대선과 가까운 시기에 개봉한다는 점에 대해 부담은 없나.
정지영 감독: <부러진 화살> 끝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마침 일이 빨리 진행돼서 11월에 개봉하게 된 거다. 개봉 시기에 대해선 전문가가 아니라 언제가 적절한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선 전에 해야 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메이저 배급사와는 일부러 접촉을 안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다 연락을 했고 그들이 아직 결정을 안 한 거다. BIFF가 끝난 후 관객의 반응에 따라 결정될 거라고 알고 있다. 혹시라도 확정되지 않는다면 직접 배급을 해야 할 거다.
<#10_QMARK#> 그럼 이 작품이 대선에 영향을 미칠 거란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정지영 감독: 당연히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 사회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감독으로서 보람을 느낄 일 아닌가. 그리고 반드시 대선 후보들 모두를 극장으로 초청할 거다. 물론 그 분들이 응해줄 진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테마가 과거를 극복하고 통합과 화해의 길로 나아가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후보들이 다 봤으면 좋겠다.
<#10_QMARK#> <부러진 화살> 등을 포함해 늘 사회적 이슈를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감독으로서의 몫이라 생각하기 때문인가.
정지영 감독: 지금까지 만든 모든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고 내가 던진 질문을 함께 토론하길 바라며 만들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부산=한여울 기자 sixteen@
10 아시아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
10 아시아 편집. 김희주 기자 fifte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