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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기업인 집행유예, 애국인가 망국인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48초

횡령 등 범죄 저지른 기업인 집행유예 금지는 당연


법안을 제출한 새누리당은 물론 민주당 등 야권 인사들까지 기업인 집행유예 금지 법안은 공정사회로 가는 기본조치라고 말한다. 재벌 총수 등 기업 오너의 투명경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1988년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 한 가정집에서 교도소 탈주범 4명이 가족을 인질로 삼고 경찰들과 대치하다가 사살되거나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인질극을 벌인 탈주범 중 한 명은 당시 “대한민국은 돈 없고 빽이 없으면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라며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쳤다. 그 이후 24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에는 이 말이 다시 한번 회자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제출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특가법) 개정안이 발의되면서부터다.


법안을 발의한 새누리당을 비롯해 민주당 등 야권까지 특가법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횡령·배임 규모가 30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이나 15년 이상의 징역을, 50억원 이상 300억원 미만이면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7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현재는 횡령·배임 규모가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의 유기징역, 50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판사 재량으로 정상을 참작해 법원이 형기의 2분의 1까지 작량감경할 수 있어 대다수 집행유예가 선고됐었다.


그러나 민 의원이 발의한 특가법 개정안은 법원이 재판 과정에서 형기를 감경한다고 하더라도 집행유예 조치를 할 수 있는 3년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면 배임·횡령을 저지른 대기업 총수들은 실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는 이 개정안이 법의 공정성과 집행의 형평성을 국민 눈높이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기업 총수들이 횡령이나 배임을 저질렀을 때 법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라는 의미로 국민의 법 감정에 충실했다고 주장한다. 즉,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1999년 이후 10대 재벌 총수 중 7명이 2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실형은 단 한명도 받지 않고 모두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를 때 반드시 입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경제개혁연대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149명의 기업인 중 125명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횡령이나 배임은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로 철저하게 도덕성을 지켜야 함에도 대기업 총수 등 기업인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왔다.


시민단체와 국민도 이번 법안에 쌍수를 들고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재벌 총수 등 오너들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등 각종 핑계로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경실련 관계자는 “그동안 재벌 총수들은 수백~수천억원을 횡령하고도 집행유예 등의 선고를 받거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며 “어느 누가 보더라도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번에 발의한 법안이 반드시 현실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업오너 겨냥한 특정 법률 ‘법의 평등원칙’위배


기업인의 집행유예를 금지하도록 한 특가법 개정안의 취지는 알겠지만 양형기준은 입법부가 아닌 사법부의 고유영역으로 재벌이라는 특정계층을 겨냥해 제재한다는 것은 평등권을 위배하는 조치다.


경제인과 학계 일부에서는 정치권의 기업인 집행유예 금지를 담은 특가법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재벌 총수들은 대놓고 표현하지 않고 있지만 “특가법은 기업 총수 등 재벌 오너를 정조준한 것으로 대선을 이기기 위해 민심을 얻으려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유럽발 위기가 세계 경제를 수렁으로 내몰고 있는 이 시기에 재계 오너들의 손발을 꽁꽁 묶는 법안이 나오는 것 자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재계에서는 기업인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기업 오너 등 특정계층을 겨냥한 법안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상황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선을 앞두고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인 행태가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고 꼬집고 나선 것이다.


대기업 총수나 기업 오너가 배임·횡령 등의 잘못이 있다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재계 총수 모두의 문제로 내몰면 안 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대기업 오너 경영 체재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특가법이 통과된다면 오너의 활동반경이 줄어들고, 이는 일자리 창출이나 경제 위기 상황 대처 미흡 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달 제주 서귀포시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37회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인이 횡령 등의 죄를 짓는다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업인에 대해서’라는 전제아래 집행유예를 금지한다는 것은 법의 평등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미명아래 재벌 총수를 겨냥한 특가법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들도 배임이나 횡령을 저지른 기업인이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고 해서 모두 특혜를 누리고 있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유전무죄라는 국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강조하며, 새누리당의 특가법 개정안은 입법부의 처분적 조치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명지대학교 조동근 교수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집행유예 남발을 견제하는 것과 (집행유예)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치다”면서 “법이 특정계층을 겨냥해 이를 정형화 한다는 것은 처분적 법률로 법의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경영 활동 결과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배임의 경우 명확한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며 “만약 대기업의 오너가 이사진의 반대에도 신규 사업을 진행했다가 손실을 봤다면 이를 배임이 될 수 있는 사안으로 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고 덧붙였다.


이코노믹 리뷰 홍성일 기자 h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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