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 얼굴을 비추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단 몇 초뿐이라 해도 그들은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그들은 한 마디 말이나 찰나의 표정만으로 흔적을 남기고, 작품에 그들만의 인장을 남긴다. 세상은 그들을 조연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이야말로 연기가 모두를 위한, 모두의 빛나는 순간임을 보여준이다. 그래서 <10 아시아>가 총 4회에 걸쳐 네 명의 배우들을 소개한다. 모두 오래전부터 연기를 하며 자신의 얼굴을 정성스레 빚어 온 이들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배우 김병옥이다. SBS <패션왕>에서 권력과 명예에 약하고, 의뭉스러운 미소 뒤에 야심을 감춘 J 패션의 디자이너 김 실장, 영화 <올드보이> 속 이우진(유지태)의 경호실장과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로부터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그 단발머리 전도사다. 보기만 해도 압도당할 것 같은 강렬한 인상과 달리, 감수성 예민한 시인 같았던 김병옥과의 대화를 옮긴다.
“악에 가까울수록 매력은 더 있는 것 같다”
<#10LOGO#> 2008년 MBC <밤이면 밤마다>에 이어 TV 드라마 출연은 <패션왕>이 두 번째다. 그때보다 좀 더 적응이 되는 것 같나.
김병옥: 비슷하다. 그땐 도굴이나 밀수를 하는 도둑놈 역할이어서 비교적 적응이 쉬웠는데, 이번에 맡은 디자인 실장은 사실 내 코드와 거리가 좀 있는 직군이다. 만날 내가 ‘하, 힘들다’ 그러면 의상이나 분장을 챙겨주는 친구들이 굉장히 위로를 많이 해주고 있다. (웃음)
<#10LOGO#> 디자이너라는 인물을 표현하기가 까다로웠을 텐데, 제작진은 어떤 느낌으로 가달라고 하던가.
김병옥: 특별한 건 없었고, 감독님이 말하길 너무 전형적인 디자이너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더라. 그런데 그게 아주 미묘하게 어렵다. 드라마는 캐릭터에 대해서 토론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더욱 그렇다. 연극은 한두 달 연습하는 동안 같이 술도 마시면서 얘기를 하는데, 드라마는 정말 본인이 알아서 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정형화된 스타일을 피하려고는 하지만 비껴가기도 참 애매하다. 더 가면 느끼하고, 덜 가면 재미가 없고. 그 경계가 아슬아슬해서 힘들기도 한데 재미는 있다.
<#10LOGO#> 본인이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김병옥: 외형적인 미장센에 신경을 써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헤어컬러를 바꿔봤다. 가만히 있어도 독특한 느낌을 풍겨야 하지 싶어서. 그리고 의상도 리본을 묶는 블라우스나 땡땡이 바지에 레깅스 같은 것들을 입지 않나. 의상팀에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주고 있다. 그런 옷을 입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불편하다. 나이 쉰 셋에.... (웃음) 모델들처럼 슬림해야 옷이 잘 어울릴 텐데, 또 내 몸매가 그렇진 않고. 그래도 이젠 적응이 많이 됐는데 겹쳐 입는 게 워낙 많으니 요즘엔 더워서 힘들다.
<#10LOGO#> 외적인 요소들 때문에 눈에 확 띄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순간 화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영화들에서도 웃는 얼굴을 클로즈업했는데 음험한 분위기가 난다든지 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김병옥: 그건 그냥 감독님이나 카메라 감독님들이 잘 잡아주시는 거다. (웃음) 주로 조폭 두목이나 사채업자 등 사악한 인물들을 많이 맡았는데, 내가 신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부분을 갖고 있나 보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특히 배역에 집중할 때는 유독 세 보이는 것 같다.
<#10LOGO#> 그런 역할을 연기할 때는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집중하나.
김병옥: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지 않나. 햄릿의 대사 중에 “내 머릿속에는 온갖 나쁜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데 그걸 행동에 옮길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게 있다. 어떻게 보면 우유부단한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착한 마음으로 돈을 빌려줬는데 떼이고, 선의가 사기로 돌아오는데 개인이 일일이 징벌하거나 복수할 수가 없는 거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면 아마 다들 교도소에 가야 하겠지. 그래서 악역을 맡았을 땐 가끔 눈을 감고 누워서 10년, 20년 전의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10LOGO#> 아무래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이미지는 <친절한 금자씨>의 전도사나 <올드보이>의 경호실장일 거다. 계속 센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것 같다는 고민은 없나.
김병옥: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어차피 사람 사는 게 흘러가는 거고,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데 그렇게 사소한 역할들까지 다 기억하겠나. 물론 영화 쪽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들은 내 캐릭터에 대해 고정관념을 가질 순 있겠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어떤 작품에 내가 지금 있어야 되겠다, 필요하겠다 그러면 언제든 환영이다. 어차피 모두 주인공을 할 수가 없으니까 부수적인 악역들이 나한테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그러고 보니 작년 11월에 <콩가네>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그건 주인공인데도 나쁜 놈이었네. (웃음) 가족들을 무시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였다. 어떻게 보면 악에 가까울수록 매력은 더 있는 것 같다.
<#10LOGO#> 롤모델로 삼는 악역도 있을까. (웃음)
김병옥: 허장강 선배님 같은 경우에도 악역을 많이 하셨는데, 굉장히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셨다. 후시녹음으로 대사를 입혔던 그 당시에, 그 정도로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연기를 하신 분이 흔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립 서비스를 해서 살아가는 한량의 연기를 굉장히 리얼하면서도 구수하게, 정감 있게 하시더라.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김 마담 밥이 문제가 아니야” 뭐 이런 유행어들이 있다. (웃음) 악역이라도 보는 사람에게 어떤 공감을 전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공통분모인 거다. 그 안에 인간의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 거니까. 대지 위에 독풀도 있고 몸에 이로운 풀도 있듯이, 공통분모는 바탕에 깔려 있고 나머지는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겠지.
“문학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10LOGO#> 그런 점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요소들도 있나.
김병옥: 특별히 없지만, 멜로라인이 있다든가 약간 닭살스러운 것들은 좀 힘들다. (웃음) 일상적으로 그런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연극 무대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하거든. 어떤 행동이나 느낌으로 보여주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나이 오십이 넘어 가니까 멜로를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 예를 들어, 확실한 멜로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영화 <엑기>에서 다카쿠라 켄이 우연히 역 근처 사케집에서 술 한 잔을 마시면서 주인여자와 이야기하는 장면 같은 것들. 또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로베르토 베니니가 경쾌하고 명랑하게 여자한테 대쉬하는 걸 보면 야, 저런 건 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멜로인데 많이 닭살스럽진 않은 느낌인 거지. 사실 너무 닭살스러운 영화는 못 참는다. 보다가 “이거 뭐야? 에이~ 짜식. 야, 나가자” 이렇게. (웃음)
<#10LOGO#> 지금 하고 있는 연극 <서툰 사람들>에서 맡은 멀티맨이 멜로와 코미디를 다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일 수도 있겠다.
김병옥: 장진 감독이랑 <로맨틱 헤븐>, <퀴즈왕>이라는 작품 두 개를 같이 했었는데, 이번에 연극을 하게 됐다고 하면서 지난 1월에 전화가 왔더라. 9년 만에 다시 하는 연극이라 처음엔 좀 많이 망설였지만 작품이 잘 짜여 있어서 쿨하게 오케이했다. 자살소동을 벌이는 기러기 아빠 김추락과 순애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서팔호, 주인공 유화이의 아버지인 유달수를 동시에 연기하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무대 뒤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굉장히 색깔이 다른 인물들이라 더 재미있다.
<#10LOGO#> 예전에 극단 목화에서 한창 활동할 때와 달라진 점을 느끼나.
김병옥: 그땐 작품을 하면 거기에만 몰두했다. 이거 끝나면 또 다른 작품 해야지, 하고 대본만 들여다보고 살았다. 어차피 극단 자체도 만날 연습하고, 돌아가면서 여러가지 작품에 다 출연하는 시스템이었으니까. 마흔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팍팍하고 절망 투성이인데, 우리가 여기서 어떤 아름다움이라는 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을 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후배들이랑 만나면 술을 마시면서 내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만났지, 미워하기 위해서 만난 게 아니다. 이 작품이 끝나면 우리가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라는 거다. 그래도 말을 많이 하진 않는다. 그러면 애들이 귀찮아하거든. (웃음)
<#10LOGO#> 그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김병옥: 아르바이트라는 건 돈을 받아야 아르바이트지, 우리 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가서 뭐 일하고 밥이나 먹으면 되고, 저녁에 소주나 한잔 얻어 먹으면 되는 거지. 야, 오늘 저녁에 삼겹살 먹는구나, 하면서 두근두근 대고 그랬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 삼겹살인지. (웃음)
<#10LOGO#> 극단 입단도 연극과를 나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텐데,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김병옥: 거의 술을 먹거나 책을 봤다. (웃음) 사실 연극과는 문예창작과 면접을 보러 갔다가 교수님의 제의로 들어가게 된 거라, 문학에 대한 아쉬움이 좀 많았다. 문학적으로 친했던 한 친구와는 만날 “야, 누구 책 읽어봤냐? 그거 한번 읽어 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작가 한 명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어디서 술을 마시고 어디서 커피를 마시는지 까지 다 훑고. 영화도 <대부> 같은 걸 혼자 보고 나와서 야, 진짜 잘 만들었다 생각하면서 괜히 감상에 젖어서 술 한 잔 마시고 그랬다. 요즘에도 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를 자주 본다. 원래 혼자만의 세계를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도 액션영화를 해보고 싶다”
<#10LOGO#> 문학에 훨씬 더 관심이 깊은 것 같아서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김병옥: 어릴 때부터 이소룡 마니아였다. 그 당시에는 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소돔과 고모라>, <벤허> 같은 영화만 있고 액션물이 드물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당산대역>을 봤는데, 너무 감명을 받아서 친구들한테 3일 동안 영화 이야기를 했다. 미장센을 하나하나 더 설명한 거다. 여기 얼음 창고가 있었고 이소룡이 나와서 옷을 딱 벗고 말이야, 하는 식으로. 그런 액션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직까지 못해봤다. 맨몸으로 싸우는 것도 좋고, 검도를 했으니까 칼 쓰는 것도 해보고 싶다. <자토이치>나 <킬 빌> 이런 거.
<#10LOGO#> 검도를 했다고?
김병옥: 액션물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배웠다. 사실은 <금각사>를 쓴 미시마 유키오에게 빠져서 배운 거기도 한데, 그 사람이 할복자살하기 위해서 검도를 배우고 마흔다섯 살에 진짜 그렇게 죽었다. 나도 그런 동경이 있었던 거지. 남자가 대충 마흔다섯 살 정도 됐으면 죽어야 되는 거 아니야? 어느 정도 자신의 일을 이루었으면 자살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다.
<#10LOGO#> 일본 작품들을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
김병옥: 다카쿠라 켄이나 <블렉 레인>에 나온 마츠다 유사코 등 일본 배우 중에 멋있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는 오다기리 죠도 멋있고. 그 중에서도 기타노 다케시의 광팬이다. 아마 다케시가 만든 영화는 다 봤을 거다. DVD도 전부 가지고 있고. 시간만 있으면 아무 때나 다시 꺼내서 본다. 거칠고 무뚝뚝하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미학이 있는 것 같다.
<#10LOGO#> 혹시 기타노 다케시처럼 감독과 배우를 병행하고 싶은 생각도 있나.
김병옥: 기회만 되면 얼마든지 하고 싶지.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모든 걸 다 빼앗긴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IT 기기나 매스미디어들이 자꾸 사람들의 영혼을 침범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식당이나 목욕탕, 심지어 화장실을 가도 TV가 있고 틀면 하는 이야기는 다 똑같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영혼이 잠식당하면서 점점 멍청해지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방송이든 영화든, 누군가가 지금쯤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삼성전자 혼자 배터지게 잘 먹고 잘 살고, 나머지 하청공장은 다 문을 닫거나 힘들게 사는 게 정상적인 나란가. 보통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약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으니까, 예술가가 해야 한다고 본다.
<#10LOGO#> 주연도 직접 맡을 건가.
김병옥: 에이,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안 해봤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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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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