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오는 11일이면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동일본 대지진 발생 1년이 된다. 당초 대지진으로 무너진 산업시설에 대한 재건 수요가 활발해지면서 오히려 일본 경제가 활력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재건은 거의 시작도 못 했다. 방사능 피폭 우려로 엄두를 내지 못 하고 있다. 일본의 재건은 대지진의 상징으로 남은 후쿠시마 원전을 처리한 뒤에야 시작된다고 해야 하지만 일본은 아직 원전 처리 문제를 고심 중이다.
원전 폭발로 최대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현은 하치로 요시오 전 경제산업상의 말처럼 죽음의 땅이 돼 인간의 접근을 허용치 않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일본의 표정은 어느정도 충격에서 벗어난 듯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에 1년은 이른 시간이다. 엔고, 31년만의 무역적자, 소니, 파나소닉 등 대표 기업들의 잇따른 적자 발표는 일본인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재계는 산업공동화, 모노즈쿠리 정신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서민들은 방사능 오염으로 매일 먹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중심을 잡아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가장 흔들리고 있다. 올해 일본은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이후 6번째 총리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무엇보다 일본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더 큰 대지진이 올 수 있다는 공포감이다. 일각에서는 1923년 14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관동대지진이 재연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관동대지진 재연되나= 나카가와 마사하루 일본 방재 담당 대신은 지난해 대지진 탓에 일본이 자연재해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연재해가 실제로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방법에 대해 근본적으로 변화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지진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에서는 거의 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 7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실종자 수가 1만912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고 전했다.
대형 자연재해 앞에 '원전 강국' 일본의 위상도 허상이었음이 드러났다. 일본 전역의 54개 원전 중 52개가 가동을 중단한 상태이며 4월까지 나머지 2개의 원전도 가동을 중단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3위 경제대국,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튼튼히 대비해 있다고 생각한 일본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과학자들은 쓰나미의 위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부에서 지난해 지진 당시 사망자보다 10배나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특히 수도 도쿄를 비롯해 일본 중심부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일본을 뿌리채 뒤흔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도쿄대학교 지진연구소는 수도권에서 향후 4년 안에 규모 7.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할 확률이 50%라고 추산했다.
◆적자에 허덕이는 日대표 기업들= 일본 기업들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표적인 일본 전자업체 소니와 파나소닉은 최근 잇달아 사장 교체를 발표했다. 소니는 이달 마감되는 올 회계연도 적자가 2200억엔을 기록해 4년 연속 적자를 예상하고 있다. 파나소닉도 올 회계연도에 사상 최대인 7800억엔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엔화 가치가 사상최고 수준으로 상승, 고전을 면치 못 하던 일본 기업에 대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 파괴는 말 그대로 직격탄이 됐다.
세계 1위를 달리던 일본 도요타 자동차는 지난해 폭스바겐, 제너럴 모터스(GM), 르노-닛산에 밀리며 세계 4위로 밀려났다.
도요타 자동차의 도요타 아키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말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급격한 엔고 때문에 일본 전체 자동차 산업의 붕괴가 시작됐다고 말한 바 있다. 니시무라 기요히코 일본은행(BOJ) 부총재는 일본 제조업의 근간인 모노즈쿠리 정신의 붕괴 우려를 제기한 바 있다.
기요히코 부총재는 지난해 말 재계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엔고가 임계 수준을 넘어 일본 산업의 공동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순히 공장을 해외로 옮기는 것 뿐만 아니라 모노즈쿠리로 일컬어지는 일본 전체 제조업의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이 경우 엔화가 향후 다시 평가절하되더라도 일본 제조업이 회복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나바 요시미 도요타 북미법인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은 올해 초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북미에서 수출용 차량을 생산할 기회를 찾고 있다고 말했으며 로이터 통신은 이에 대해 도요타는 북미가 수출 근간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해석한 바 있다. 도요타는 지난해 한국에 수출하는 캠리를 자국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출하할 것이라고 밝혔다.
급격한 엔고로 인한 수출 부진 탓에 일본은 지난해 2차 오일쇼크를 겪었던 1980년 이후 31년만에 연간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또 지난해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0.9% 줄어 2년 만에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도요타 자동차가 올해 글로벌 판매 목표치를 지난해보다 21% 늘어난 858만대로 잡는 등 일본 기업들은 올해 지난해 대지진과 엔고 충격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 부채위기와 이란 핵 문제와 관련된 중동 불안과 이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 등 외부 환경이 우호적이지 못해 낙관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피폐해진 서민생활..총리 또 교체되나= 대지진 이후 일본인의 생활상도 피폐해졌다.
현재 사고 원전 반경 20㎞ 이내인 '경계구역'은 강제 피난 구역으로 설정돼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고 원전에서 300㎞ 떨어진 수도권에서도 기준치 이상의 세슘에 오염된 농작물이 나왔다. 사실상 일본 전역에서 매일 먹거리를 사면서 방사능 오염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쓰나미와 원전 폭발로 생활터전을 잃은 수만 명의 이재민들은 임시 주택에서 기거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상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 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불만도 높아져가고 있다. 작년 9월 출범 당시 60% 안팎이었던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최근 20%대로 떨어졌다.
정부는 거듭된 발언 실수로 화를 자초하고 있다. 전임 간 나오토 내각은 원전 사고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기를 키웠고 또 방사능 유출과 관련해 많은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새로이 총리에 취임한 노다 요시히코는 원전의 단계적 폐지를 추진하겠다던 전임 총리와 달리 경제 회복과 전력난 해결을 위해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겠다고 논란을 낳았다.
원전에 대한 여론의 불만은 높은데 전력 공급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원전을 대신할 전력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현재 일본 정부의 고민이다.
현지에서는 지지율이 떨어진 노다 총리가 올가을 이전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 5년간 복구 비용으로 16조2천억엔, 10년간 23조엔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집중 피해 지역인 도호쿠(東北) 3개 현은 향후 10년간 30조엔 이상이 투입돼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병희 기자 nut@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