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또 무산된 한미FTA 비준안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두고 여야간 공방과 힘겨루기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지난 3일 직권상정을 포기했지만 아직도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민주당은 FTA 비준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장외 홍보전에 돌입하는 등 원내외 병행투쟁에 들어갔다. ISD를 놓고 여야간 갈등이 접점을 찾지 못하자 경제계는 FTA의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번 한나라당이 지난 3일 직권상정을 포기하면서 또다시 국회의 직무유기에 대한 비판론이 확산되고 있다. 당연히 목소리를 높이는 곳은 경제계다. 이제는 실망감을 넘어 직접적인 비판의 목소리도 낼 태세다. 경제단체들이 이처럼 한미FTA 비준안에 목을 매는 핵심 이유는 ‘수출’ 때문이다.
기업체들은 현재 저마다 대미 수출전략을 수립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비준안이 늦어질수록 전략을 새롭게 수립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 수출은 까다로운 편이다. 요건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한미FTA 비준안이 늦어질수록 그에 따른 손해가 막심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유럽발 금융 위기에 이어 최근 글로벌 재정 위기가 겹치면서 기업들의 수출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기업체들이 이번 한미FTA 비준안을 조속히 실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다.
최영우 포항상의 회장은 최근 열린 전국상공회의소 회장 회의에서 “지역업체인 포스코가 올해 투자를 1조원 줄이는 등 기업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라며 “우리나라는 수출을 통해 수익을 얻는 나라인 만큼 한미FTA가 더욱 절실하다”고 비준안 통과를 강조했다.
특히 국내 경기 침체가 길어지는 만큼 대미 수출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야만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 경제계의 설명이다. 대한상의는 이날 대미 수출기업 500개사를 상대로 한 조사 결과도 내놓았다. 전체의 91.2%가 한미FTA가 발효되면 미국시장 진출을 강화할 계획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한미FTA가 기업 경쟁력 강화의 큰 계기가 될 것으로 대한상의는 보고 있다.
한미FTA 발효가 국내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도 도움이 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한미FTA가 발효되는 것을 우려할 정도로 우리 국회의 비준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 언론은 연일 “한미FTA가 발효될 경우 한일 간 대미무역 경쟁에서 자국 기업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우려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최근에는 손익계산까지 내놓는 언론사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野, ‘쟁점 ISD’ 빌미 경제단체 요구도 묵살
이번 여야 간 한미FTA 비준안 쟁점은 ISD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도)다, 야당측은 FTA 독소조항으로 꼽으면서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만큼 조항을 수정하지 않으면 통과하지 않겠다며 맞서고 있다.
ISD는 말 그대로 우리기업이 미국에서 활동하거나 미국기업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보호장치다. 외국에 투자한 기업이 상대방 국가의 정책으로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국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중재센터(ICSID)나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 등 국제중재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다. 부당한 차별대우에 따른 해외투자자의 피해를 막기 위해 도입됐고, 외국인이나 기업의 투자를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제도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미국에 대해 외국인직접투자(FDI)를 많이 하고 있어 미국기업들이 한국에 투자하는 규모를 이미 크게 넘어섰다. 15년만에 양자간 규모가 역전됐을 정도로 우리의 대미 투자가 활발해 이 같은 제도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얘기다.
또 중국의 국내 투자액보다도 10배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나 우리 투자자들이 해외에 직접투자해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경제단체들이 ISD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전국은행연합회는 공동 성명을 내고 “ISD는 미국에 투자한 우리 기업을 보호하는 장치”라면서 야당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 단체는 “최근 5년간 우리가 미국에 투자한 금액은 220억달러인데 반해 같은 기간 미국이 우리나라에 투자한 액수는 88억달러에 불과하다”며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금액이 2.5배에 달해 결국 ISD는 우리 기업의 이익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인 셈”이라고 강조했다.
단체에 따르면 ISD는 한국이 체결한 81건의 투자보장협정과 6건의 FTA에 포함돼 있어 전 세계 2500여건의 투자협정 대부분에 포함됐다. 따라서 한미FTA에서만 ISD가 안 된다는 일부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는 반론이다. 또 투자분쟁이 발생하면 중립적인 제3국 국제중재절차에 따르도록 해 미국에만 유리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단체는 “중재 절차는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나 UN국제상거래법 위원회 등 국제적으로 인정된 공정한 절차를 갖고 있어 미국에만 유리하다고 보는 시각은 접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여당은 한발 물러나 ‘비준안 통과 이후 재협의가 가능하다’며 길을 열어뒀지만 야당은 ‘폐지’를 외치고 있어 비준안 통과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쟁점이 계속될수록 ISD와 관련한 루머들이 인터넷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ISD 즉, 투자자 국가소송제도는 2004년 새롭게 마련된 미국의 투자협정 표준안에 기초한 것이라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고 있다. 또 제3의 판정기관(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하면 중립적인 분위기에서 조약 당사국간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여당은 "ISD는 우리기업이 안정적으로 미국 투자를 할 수 있는 보호장치를 제도화 시킨 것"이라며 "이는 미국의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도 2007년부터 TF팀을 꾸려 ISD 조항을 살폈고 이론상 허점이 있다고 보면서도 예외조항을 두고 있어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지난 4일 “ISD가 미국에 편향됐다는 주장을 하는데 실제로 국제분쟁제도 운영 실태를 살펴보면 야당이 주장하는 미국의 승소율은 매우 낮다”고 밝혔다. 국내에 투자한 외국기업이 매번 소송을 통해 한국법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반면 야당은 ISD가 국가 정책과 사법 주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독소조항이라고 맞서고 있다. 야당은 중재기구에서 판정을 내리기 때문에 한국 사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캐나다의 한 기업이 미국 법원 패소에 불복하고 국제 중재를 통해 ‘미 법원 결정이 부당하다’는 결정을 받아낸 사례를 들고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골목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유통발전법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시장보호조례’ 등이 미국의 기업형 슈퍼마켓(SSM) 진출을 막는다고 할 경우, 미국기업들이 중재신청을 통해 유통발전법 등을 무력화시키려 시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ISD조항 뺄 경우 우리 산업 되레 역효과
이처럼 여야간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면서 일부에서는 “ISD 조항을 제외한 재협상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FTA 비준을 끝낸 상태이며, ISD 조항을 빼놓는다면 자체 실익도 줄어든다는 것이 경제단체들의 설명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ISD 조항을 뺄 경우,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외국과의 FTA 협정에서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며 “무엇보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사기를 당하거나 불리한 정책으로 곤경에 처해도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미FTA 체결 이후 우리 경제와 산업계는 큰 변화를 가지고 올 것으로 보고 있다. 관세 인하가 예상되는 자동차부품과 섬유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이 확대할 수 있어 이번 국회 비준안 통과에 큰 기대감을 나타냈었다.
공식 발효땐 자동차·부품·섬유산업 최대수혜
섬유업계는 13.2%에 달하는 관세가 단계적으로 사라지면 경쟁력이 크게 확보된다. 효성을 비롯해 웅진케미칼 등은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되면 대미 수출이 연간 2억달러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대모비스나 만도 등 자동차 부품업계는 2.5~4%의 관세가 없어지면서 수출이 확대된다고 장담했다. 현대모비스는 “국회 비준안이 통과되면 대미 수출길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며 큰 기대를 보이는 중이다.
코트라도 국내 중견, 중소기업 60여곳과 함께 지난1일 미국자동차 A/S부품 박람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한미FTA가 시작되면 미국 판로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멕시코나 중국보다 품질은 물론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어 사실상 미국에서 ‘돌풍’을 기대하는 중이다. 코트라는 국내기업의 수출 확대를 위해 마케팅 활동을 강화할 예정이다.
자동차업계와 전자업계는 당장 관세 인화가 시작되지 않는 만큼 차분한 분위기다. 다만 4년 이후 새롭게 수출 전략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관세가 없어지는 만큼 다른 나라의 자동차와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어 대미 수출 전략을 새롭게 잡을 수 있다.
현대차 등은 이미 미국 현지 생산량이 높아 한미FTA 비준안이 통과되더라도 당장 효과는 크게 얻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자동차업계의 분석이다. 다만 관세 철폐 이후 자동차 가격 인하가 최대 이슈가 될 전망이다.
현대차는 4년 이후 관세 폐지 이후 가격 인하에 정책을 수립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이벤트와 딜러에 대한 이윤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으로 알려졌다. 반도체나 컴퓨터, 휴대전화 등은 이미 세계무역기구(WTO) 정보기술협정(ITA)에 따라 무관세로 수출되고 있어 FTA 효과는 미미하다. 삼성이나 LG전자 측은 멕시코 등에서 생산 중이고 LCD 모듈과 2차 전지 역시 멕시코나 중국에서 생산 중이어서 수혜 품목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교역량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 한국산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항공업계와 해운업계는 협정이 발효되면 교역량이 늘어나고 인적교류가 활발해지는 등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미 국제무역위원회에 따르면 한미FTA 시행 첫해 한국의 미국 수출은 109억달러로 추산된다. 이는 콜롬비아와 미국FTA 체결 이후 추산한 11억달러보다 10배에 이르는 규모다. 대외경제연구원 등 10개 국책연구기관도 발효 이후 향후 10년 동안 한국 경제에 실질 GDP가 5.7%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연평균 27억7000만달러의 추가 무역수지 흑자와 35만개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분석했다. 경제단체들이 자동차 등 수출 증대 효과가 7억2000만달러에 달한다며 조속한 국회 비준을 촉구하는 이유다.
현재 우리 정부는 2004년 칠레와의 FTA를 시작으로 아세안(ASEAN), 인도, EU, 페루 등으로 FTA 네트워크를 넓히는 중이다. 기획재정부는 한미FTA가 발효될 경우 우리와 FTA를 체결한 국가와 경제권의 경제 규모가 약 61%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세계 3위 수준이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주요국과 FTA 체결 효과 비교분석’을 통해 한미FTA를 조속히 실현해야 한다고 비준안 통과를 촉구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FTA 체결국가와 경제권 그리고 교역량, 무역수지 효과 등을 감안할 때 한미FTA 등을 신속하게 마무리해 우리 경제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코노믹 리뷰 최재영 기자 som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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