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약속> 3회 SBS 월-화 밤 9시 55분
서연(수애)은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여자다. 사고사한 아버지에 이어 엄마마저 잃은 여섯 살 이후로 그녀의 삶은 온전한 빚이었다. 다른 이들의 삶을 대필하는 것이 생계수단이었고, 유일하게 욕심 낸 사랑마저 남의 것을 잠시 훔친 “도둑질”과도 같았다. 그 존재의 무의미성은 “인생 자체가 신파”인 서연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다. 지형(김래원)이 그녀와의 통화기록을 삭제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무섭게 화를 낸 것도 마치 자신이 삭제되는 듯한 기분을 느껴서라고 했다. 서연이 자존심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건 그것만이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신세진 빚을 다 갚고 지형과의 사랑마저 청산한 뒤 벼락처럼 찾아온 기억상실은 그렇게 한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을 함축하기에 그토록 무겁고 비극적이다.
어제 서연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독백처럼 읊조린 대사들은 그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모든 기억이 사라져가면서 나도 함께 사라져간다는 거죠.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건가요. 나는 어디로 가나요.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이렇듯 초반부터 서연 캐릭터의 무게가 섬세하게 직조되자 그 이후로는 그녀가 그저 거리를 걷거나, 멍하니 멈춰서거나, 조용히 앉아있거나 하는, 홀로 있는 모든 장면들에서 묵직한 고통이 전달된다. 3회 마지막 신에서 서연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과 삶의 이력을 소리 내어 말하며 알츠하이머와의 싸움을 선언한다.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던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서연 역시 존재의 소멸에 “반항”하기 위해 이제부터 진정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천일의 약속>은 신파 멜로 이전에 한 여인의 실존적 사투를 담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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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김선영(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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