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회장 최측근들이 밝히는 인간 MK
"잘해 먹여야 된다...직원 식당을 부페로 합시다" 아이디어 직접 내
미국서 철판 수송 시간 촉박하자 비행기 5대로 나눠 실어
[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측근들은 그를 강한 리더십과 부드러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업무에 임하면서도 감쌀 때는 넓은 포용력을 보였다고 한다. 정 회장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측근들의 충성도를 높이는데도 크게 작용했다.
박정인 전 현대모비스 회장이 말하는 MK
내가 그 분(정몽구 회장)과 인연을 맺은지도 벌써 40년이 됐다. 1972년 정 회장께서 현대차 원효로사업소장을 맡을 때 나는 그곳에서 경리과장을 하고 있었다. 첫 인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의외의 면이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치밀하고 섬세하다. 아무리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4년 3월1일 현대차써비스라는 회사 발족과 함께 회장께서 당시 사장을 맡았고 나도 같이 따라갔다. 그때부터 CEO를 맡고 있으니 경영자 능력을 지금까지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정 회장은 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원효로 사업소장 시절부터 자동차 부품을 많이 알았다.
1977년 현대차써비스는 서비스망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서울, 부산 외에 대전, 대구 등 곳곳에 정비공장을 세웠다. 다른 회사가 못 쫓아올 정도였다. 경영 감각이 탁월했다. 이 때부터 제조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그 작품이 현대정공이었다.
현대정공은 사업을 무척 많이 했다. 컨테이너 생산 세계 1위 기업에도 오르고 특장차, 골프카사업 등도 진행했다. 창원에 현대차량이라는 탱크 만드는 업체가 있었는데, 1985년 현대정공으로 합쳤다.
정 회장은 자동차에 미련이 많았다. 1987년 노조가 극심한 파업을 벌이자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자본 및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결국 자동차가 해답이었다.
어떤 차를 생산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때 답은 SUV였다. SUV는 당시 쌍용차가 코란도와 코란도패밀리를 생산하면서 독점하고 있었다. 현대정공은 1990년 미쓰비시 파제로를 도입해 갤로퍼를 만들었고 그 이후 싼타모도 생산했다.
이외에 공작기계, 우주항공산업, 트랜스미션도 시작하면서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돌이켜보면 그 분은 자동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 현대차써비스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의 현대차 판매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생산과 판매, A/S 등을 모두 섭렵한 셈이다.
현대정공이 승승장구하자 고 정주영 명예회장도 좋아했다. 명예회장은 과거 일주일에 한번씩 울산을 방문했는데 자동차와 정공은 꼭 둘러봤다. 격려도 많이 했다. 성공하고 잘하니 인정했다. 1985년에 현대차량까지 한꺼번에 몰아준 게 그냥 준 게 아니다. 현대강관, 현대정공, 현대차써비스, 인천제철 등을 정공그룹이라고 했는데 1995년 그룹장을 맡기도 했다.
겉모습과 달리 인정이 많았다. 다른 오너들과 비교할 때 정몽구 회장을 따르는 사람들의 충성심이 월등히 높았다. 어려운 존재이기도 했지만 열심히 잘하는 사람한테는 무척 잘해줬다. 또 직원을 내보낼 때 애지중지했던 이에게는 직접 설명했다. '나가서 잘하고 애로사항있으면 찾아오라'는 말도 덧붙이기도 했다.
정 회장은 24시간 근무한다. 새벽에도 전화를 해 업무를 지시할 정도다. 여전히 새벽 6시30분에 출근하는 것을 보면 정말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회장 중 한명이 예전부터 "이제 그만 쉬시죠"라고 해도 말을 안듣는다.
돈많은 재벌이라고 해서 사치도 부리지 않는다. 중소기업 사장들 가운데 외제차 타는 사람도 있는데 그분은 그렇지도 않고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현대정공 시절 일이 무척 많았다. 힘들고 고생해도 음식점에서 소주한잔하면서 잊었다. 지방에 내려가면 직원들과 꼭 식사를 같이 하거나 술을 마셨다. '어려움을 알고 같이 해보자'라는 말을 종종 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1979~1983년 현대정공이 신문로 서울고 자리에 있을 때였다. 당시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했는데, 운동장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멋있었다.
우리 직원은 250명 정도였지만 그곳에는 여러 회사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약 1000여 명 가까이 됐다. 당시 우리는 회사에서 식당을 운영해 입주직원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정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직원식당을 부페로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잘 해먹이라는 이유에서다. 나는 내부 살림을 맡았는데, 부페용 접시를 샀다가는 하루에 얼마나 깨질지 감당이 안됐다.
결국 남대문시장에서 스테인레스 접시를 구매한 후 승인을 받았다. 부페는 음식의 질도 좋았고 양도 풍족해 인기가 좋았다. 직원들은 밖으로 식사를 나갔다가도 다시 구내식당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든지 먹게끔 했다.
직원들과의 스킨십도 종종 했다. 정 회장은 테니스를 좋아했는데, 운동장 한켠에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토요일 12시쯤 직원들 같이 해서 점심에 운동하고 냉면을 먹기도 했다.
칭찬에 인색했지만 가끔 웃으며 격려를 한 적도 있다. 2004년의 일이다. 기아차 화성공장을 방문한 후 그 옆에 있는 현대모비스 쏘렌토 모듈공장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컴플리트 샤시 모듈이 생산됐는데, 외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정 회장이 "크지 않다"고 말하면서 내부를 들여다봤는데 깜짝 놀랐다. 프레임에 모듈을 달아 기아차 화성공장으로 보내는 광경을 본 것이다.
거기서 "차를 너희가 만드는구나.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다음날 임원회의를 열었는데, 기아차와 남양연구소 중역들 모두에게 현대모비스 모듈공장을 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미국 크라이슬러의 지프 그랜드체로키에 모듈을 공급을 하게 됐다. 우리로서는 매우 중요했다. 정 회장이 부르더니 "할 수 있겠냐"고 물어서 "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때가 2005년이었다.
1999년 현대모비스가 A/S부품과 모듈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보고했다. 그 분은 "인건비가 높은 상황에서 부품사업으로 성공 못한다. 또 노사문제가 발생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모듈공장에 소사장제도를 운영하면서 노조도 없었다. 인건비도 높지 않았다. 현대모비스의 모듈 경쟁력은 현대차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김동진 전 현대차 부회장이 말하는 MK
현대정공 입사 후 30년 이상 내가 본 정몽구 회장은 오직 일만 아는 분이었다. 다른 취미도 없어 보이고 매일 새벽 6시30분부터 저녁까지, 주말에도 오직 회삿일만 생각했다. 빨리 회사로 출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보일 정도였다.
어떤 날은 뵈었더니 "출근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하더라.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지을 때였다.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이 강하면서도 섬세하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국공장 건설 계획 수립 이전부터 현대차 내부에서는 현지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글로벌컴퍼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업계 분위기를 봤을 때 미국공장을 짓는 것은 도박과도 같았다. 1990년대 초반 캐나다 브로몽공장에서 철수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는 회의가 하루 2차례씩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회의를 소집하고 임원들의 얘기를 전부 들어본 후 심사숙고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 다시 회의를 주재해 결론을 내기도 했다.
정 회장은 미국 공장을 짓는데 앞서 "미국은 인건비가 비싸니 인력을 최소화하자"고 했다. 다른 공장의 사례를 참고해 기존 방식대로 해도 될 테지만 보는 눈이 확실히 달랐다.
인력을 최소화한다는 얘기는 자동화 비중을 높인다는 의미다. 앨라배마 공장에 최초로 모듈이 적용된 배경이기도 하다. 모듈은 자동화와 함께 품질을 급격히 향상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갖고 있다. 품질은 정 회장이 매일같이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 진출의 선결과제로 정 회장은 품질을 꼽았다. 1986년 현대차가 포니엑셀을 미국에 처음 수출했는데, 그 해 무려 26만대를 팔아 성공을 거뒀다. 가격은 대당 4999달러로 저렴했다. 하지만 품질 문제가 불거지면서 진출 3년째 되던 해부터 판매대수가 급격히 줄었다.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2000년 정 회장은 품질총괄본부를 그룹에 신설했다. 다음해인 2001년 품질총괄본부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 서병기 당시 전주공장장(전무)을 양재동 본사로 불렀다. 서 전무는 정 회장이 좋아할 정도로 추진력과 원칙이 강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부사장 승진과 함께 품질총괄본부를 이끌었다.
세계 5대 메이커로 도약을 위해 정 회장이 품질에 쏟아부은 노력은 엄청났다. 24시간 365일 가동되는 품질상황실을 설치한데 이어 월 2회 품질회의를 통해 문제점을 끄집어냈다. 필요하다면 협력사 사장을 직접 만나 궁금점을 해소하기도 했다.
품질총괄본부장은 협력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종종했는데, 정 회장은 회의 내용을 보고 받은 후 미심쩍거나 궁금한 사항이 있을 경우 품질회의에 직접 협력사 대표를 불러 설명하도록 했다.
모듈의 장점을 언급하자 정 회장은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인 만큼 반대도 많았다. 특히 노조의 반대가 심했다.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장기적 발전을 고려할 때 당장의 어려움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모듈화 시도는 도요타에서 시작했지만 큰 덩어리로 많이 한 것은 현대차다. 파워팩, 콕핏, 도어, 프런트범퍼 등을 모두 모듈화했다.
정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은 1980년대 후반 만들어진 첫 국산 전차 K1에도 적용됐다. 강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5년 9월 현대정공은 K1전차 2대를 시제작했다. 이 전차는 특수장갑판으로 만들어졌다. 기동력과 방어력이 뛰어나고 적의 폭격을 받아도 뚫리지 않는 장갑판이었다. 일부 철판업체가 국산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헌데 국방부가 양산 전차에는 제조원가 절감을 위해 국산 특수장갑판을 쓰라고 주문했다. 할 수 없이 만들었는데, 차체인 헐(Hull)에 금이 갔다. 용접불꽃과 철판의 인장강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수 십 대가 못쓰게 됐다.
정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 일단 납기를 맞추기 위해 미국에서 장갑판을 구하라고 지시했다. K1전차가 우리나라 국방전력화 및 국가산업의 핵심이라는 이유에서다.
당시 내가 미국에서 책임자로 있었는데, 한군데 있는 게 아니라 미국 전역을 샅샅이 뒤지면서 찾아야 했다. 물량 확보를 위해 시카고, 휴스턴, 아칸소, 앨라배마 등을 방문해 결국 찾았다. 1987년 말로 기억한다.
엄청난 규모의 철판을 한국으로 보내는 것도 문제였다. 배로 실어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보잉747기로 실어보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 전역의 물량을 LA공항으로 집결했다. 비행기에 안 들어갈 정도로 큰 것은 크기에 맞게 잘랐다.
대한항공도 이 정도로 큰 물량을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걱정을 많이 했다. 보험료도 비싸게 내 비행기 5대에 나눠 실어 한국으로 보냈다. 공수작전을 방불케 했다. 못쓰게 된 장갑차 수 십 대가 야적장에 방치돼 있었는데 이를 전부 해체해 다시 만들었다. 품질에 대한 집념 뿐 아니라 배짱도 두둑했다.
MK리더십 특별 취재팀(이정일ㆍ채명석ㆍ최일권ㆍ김혜원ㆍ조슬기나 기자) MK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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