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6 뉴프런티어정신 (중)현대정공의 끝없는 상상력
잔디깎기 엔진서 항공부품까지····성공과 실패 반복
"날마다 야근에 집에 못갔죠···돈 빌리는 게 일이었고"
15년 걸린다는 공작기계 세계수준, 5년만에 이뤄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1977년 6월30일, 억수 같은 여름 장대비가 내리던 이날 서울 175-4번지 세운상가 4층에 정몽구 당시 현대자동차써비스 사장과 임직원들이 이삿짐을 들고 들이닥쳤다. 이윽고 다음 날 현대정공이 출범했다.
현대정공은 범현대그룹 역사에서 중대한 방점을 찍는다. 현대가 중공업체제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중공업화의 인자들을 연결시키는 '링커'의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 회장 개인에게는 훗날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자동차 업체 빅5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경영기법을 터득한 요람이라는 이유에서다.
1970~1980년대 당시 세운상가에는 닭장처럼 둘러붙은 비좁은 사무실 겸 공장과 주변 골목마다 널려진 공간에 자리를 잡고 미래의 꿈을 위해 출발한 기업인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회사를 키워 국내 굴지의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 성장한 이들도 적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세운상가를 '벤처기업의 요람'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모험에 대한 열망=성공을 위한 열정과 모험심이 강한 세운상가의 문화는 결국 정 회장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3년 서울 계동 신사옥이 완공돼 이전하기까지 세운상가에서의 6년여 동안 현대정공은 벤처기업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도전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정석수 현대모비스 부회장은 '현대모비스 30년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세운상가 사무실은 저녁 9시가 되면 어김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때문에 야근하느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잔 적도 무척 많았다. 초창기 업무는 영업과 생산 위주로 활력이 넘쳤고 당시 조직도 별로 크지 않아 인간미가 넘쳤다. 네 일 내 일 따로 없이 멀티플레이어로 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 박정인 경리부장(현 HMC투자증권 고문)은 은행에 돈 빌리러 다니는 게 주요 일과였고, 나는 돈이 입금되면 그걸 찾아 결재하는 역할이어서 책임감이 무척 컸다.”
2000년대 초반 현대차 소그룹을 맡아 독립한 정 회장에게 외부에서는 “요즘 현대차엔 자동차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수근거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 전문가였던 정세영 전 현대차 회장을 따랐던 '자동차맨'들이 대거 밀려나고 그 자리에 현대정공, 현대차써비스 시절 함께 일한 측근들이 올라선 것을 빗댄 말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과 현대정공맨들이 정말 자동차를 몰랐을까? 지나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현대정공맨들은 자동차에만 '올인'했던 이들에 비해 더 많은 도전을 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손으로 노하우를 익힌 정 회장과 현대정공맨들에게 사실 자동차는 어려운 목표가 아니었다.
◆현대차를 만드는 현대 공작기계=자동차 부품과 컨테이너 제조로 내공을 키워오던 현대정공은 1987년 정 회장의 지시로 공작기계 사업 참여를 검토한다. 자동차 생산라인에 쓰이는 핵심 공작기계의 국산화와 더불어 수출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1988년 정 회장이 정 명예회장에게 공작기계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보고하자 정 명예회장은 “기왕에 하려면 제대로, 더 큰 규모의 공장을 지어서 해보라”고 격려했다. 재검토 작업을 통해 1990년 1월 총 1028억원을 투자해 울산공장 제2야드에 총 1만5000평 규모 부지에 공장단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착공 18개월 만인 1991년 10월31일 공장을 준공하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출발은 쉽지 않았다. 공작기계사업에서 득이 되는 것은 '현대'라는 브랜드뿐이었다. 그룹 의존도가 거의 없었고 지원도 못 받았다. 때마침 국내경기가 후퇴하면서 시장 수요도 감소한 데다가 업체의 난립에 고기술 수입품의 저가공세까지 겹쳤다. 다른 기업이라면 접어 버렸을 테지만 정 회장은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내수시장에서는 판매망과 사후 서비스를 강화한 덕분에 기종별로는 평균 30%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해외시장 진출도 적극 나섰는데, 1994년 7월 시카고 국제 공작기계 전시회에는 정 회장이 직접 참석해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성병호 전 INI스틸(현 현대제철) 사장은 “정밀기계인 공작기계는 기업에는 자산에 해당되는 기계라 해외에서 한국산 공작기계는 거의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규모가 작은 회사들이 주로 우리의 고객이었는데 수익이 굉장히 빡빡해 고전해야 했다. 여러 가지로 시장 개척이 어려웠지만 정 회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꾸준히 신제품 개발력을 높여 나갔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사업초반 기선을 잡아야 한다는 목표에 따라 선진국인 독일 등에서 공부한 고급인력들을 대거 유치해 기술연구소에서 공작기계 국산화 개발에 전념토록 했다.
현대위아 관계자는 “1991년 공작기계 공장이 준공됐을 때만 해도 일본은 현대가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려면 15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하지만 우리는 단시일 내에 수준을 올려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에 미국·유럽에 수출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일제와 손색이 없는 수준이어서 일본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했다”고 회고했다.
◆'승차감 좋은' 골프카=1989년 5월 현대정공은 자체기술로 개발한 골프카 양산을 개시했다. 이는 현대정공이 시작한 구동사업의 첫 작품이다. 4년 전 미국 골프카 쇼에 참석하고 돌아온 정 회장의 지시로 시작했다. 전 세계 골프장에 '노캐디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었고, 국내에도 골프카 건설이 급증해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에 따른 것이다.
국내에선 최초지만 외국 업체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현대정공은 두 가지 차별화를 이뤄낸다. 먼저 정 회장은 골프카에 '독립현가장치'를 적용했다. 독립현가장치는 승차감을 좋게 해주는 장비다. 골프카를 이용하는 골프장 이용객이 고급 자동차의 뒷자리의 편안함에 익숙했었다는 점에서 '승차감 좋은 골프카'에 대한 숨겨진 욕구를 끌어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핵심부품 중 하나인 소형엔진 자체 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1988년 전담팀을 구성해 소형엔진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했는데, 소형엔진은 골프카 이외에도 모터요트, 잔디 깎는 기계, 눈 살포기 등에 사용됐다.
정 회장은 현대차를 맡은 후 승차감이 뛰어난 기술 개발과 독자 개발엔진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는 바로 골프카에서 시작됐다.
◆1만2000개 vs 10만개=지난 2009년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당시 현대차의 대미 주력 모델인 '제네시스' 완전분해 동영상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분해된 제네시스의 부품 수는 약 1만2000여개. 그런데, 현대로템이 개발한 시속 300㎞의 고속 전철 'KTX'의 부품 수는 차체만 10만개가 넘고, 열차 운행 시스템까지 포함할 경우 훨씬 많다.
정 회장은 지난 1985년 5월31일 계열사였던 현대차량을 현대정공이 흡수합병하면서 철도차량 사업을 맡게 됐는데, 의지는 대단했다.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전무이사를 지낸 현승기 대흥정공 회장은 “정 회장은 철도차량을 주력사업으로 성장·발전시킨다는 방침을 확고히 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지시했다”며 “철도차량 기술연구소를 중심축으로 현대정공 기술연구소를 확대·개편해 제품 기술력 향상을 꾀하는 한편 1986년 1월에는 총 10개 차종을 개발한다는 중장기 사업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면서 가속도를 붙여 나갔다”고 설명했다.
현대정공의 철도차량은 1989년 연간 수주 규모가 1000억원대를 넘는 고성장을 기록했고, 1991년 1월31일에는 8인승 자기부상열차인 'HML-02'를 선보였다. 이어 1994년 6월14일에는 프랑스 알스톰과 함께 경부고속전철 철도 공급업체로 선정됨과 동시에 정부의 한국형 차세대 고속전철 개발 사업자로 선정됐다. 2002년 4월12일 철도차량이 독립해 설립된 현대로템은 국내 최초로 경부고속전철 1호 열차를 출고했다.
그 밖에도 요트와 어선, 구명정, 헬기, 항공기, 항공우주사업 등 정 회장의 시도와 상상력은 끝이 없어 보였다. 현대그룹의 신사업 대부분은 정 회장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어느 누구보다 강한 CEO로서의 역량을 쌓게 된다.
정 회장은 현대정공 시절을 “나에게 아주 좋은 경영학습의 장이었다”며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각종 경영기법을 체득할 수 있었고, 현장 중심의 경영활동을 적극 실천하며 현장의 중요성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이 30년 동안 경영철학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고 소회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시도는 하나의 정점, 즉 자동차로 향하고 있었다.
MK리더십 특별 취재팀(이정일·채명석·최일권·김혜원·조슬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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