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이끌 인물로 내정됐을 당시 그를 애송이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마켓'의 생리를 잘 모르는 책상물림이 전임자만큼 일을 능숙하게 해내겠냐는 것이다. 그런 불확실성 탓에 2006년 2월 그의 취임일이 다가올수록 금융시장은 수시로 불안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시장은 '마에스트로' 앨런 그린스펀의 절대적 권위에 중독돼 있었던 것이다.
6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버냉키 의장은 결국 시장을 장악해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연준 의장의 취약한 리더십, 이것이 지금 전 세계 경제가 안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위험 가운데 하나다.
미국의 은행으로 천문학적인 자금이 몰려들어 통화량이 폭증(지난달 미국의 M2는 30.1%나 늘었다)하고 있다. 물가 상승률은 4%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주식시장은 3차 양적완화(QE3)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을 맞을 것처럼 버냉키를 압박한다. 반대로 미국의 유력한 야당 대선주자 중 하나인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는 '돈을 더 풀면 반역죄인'이라고 버냉키를 원색적으로 몰아붙인다. 영향력이 상당한 이코노미스트이자 방송앵커 래리 커들로는 '표현이 거칠긴 했지만 맞는 말'이라고 거든다. 메릴린치는 “QE3는 연준이 정부에 예속됐음을 드러내 달러화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준 내부에서 그의 위상은 더욱 엉망이다.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와 필라델피아 연준 총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대놓고 버냉키의 '저금리 약속'을 비난했다. 연준이 주식시장 뒤치다꺼리나 하는 기관이냐는 것이다. “2013년까지 제로금리를 지속하겠다”고 공약한 지난번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이 두 사람을 포함한 모두 세 명의 위원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지난 19년 동안 이렇게 많은 내부반대에 부딪혔던 결정은 없었다.
취약한 리더십에 따른 정책 리스크는 유럽에서도 심각하다. 제2차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될지도 모를 곳이기에 우리에게는 더욱 큰 위험요소다. 재정위기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그 중심에 있다. 유로지역 국가들이 '유로본드'라는 이름으로 국채를 공동 발행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시장은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두 사람은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형편이 나쁜 나라들과 한 배를 타게 됨으로써 자기 나라의 재정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두 나라 정상이 참혹한 2차대전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라 '단결된 유럽'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분석도 있고, 분방한 문과 출신의 열혈남 사르코지와 이과 출신의 얼음공주 메르켈의 기질 차이 탓에 협조가 잘 안 이뤄진다는 시각도 있다.
합의된 리더십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로 '역사적 배경'을 드는 분석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본 프랑스가 독일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로화 통합을 밀어붙였는데, 전후 영향력 회복과 동서통일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유럽국가들과 긴밀한 관계에 공을 들였던 독일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한 칼럼니스트는 그래서 “만약 (유럽통합을 더욱 강화하는) 유로본드가 실현된다면 무덤 속의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이 결국 독일 지배력 약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게 된다. 독일이 이것을 잘 알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논란이 많은 대사(大事)를 다룰 때 정부가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앞세우는 것은 고금의 상례다. 반대진영의 논리를 누그러뜨릴 수 있고 다수의 지지 또는 묵인을 받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더십의 요체는 대의명분을 잘 짜서 대사를 순탄하게 처리하는 데 있다. 전 세계 주식시장이 앙망하는 두 가지 대사, QE3와 유로본드는 어떠한가. 지금의 리더십으로는 대의명분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안근모 증권전문위원 ahn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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