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신상정보 꿰고···공공기관 번호 이용
[아시아경제 조목인 기자]서울에 사는 김모(55)씨는 며칠 전 자신이 거래하는 농협 서초지점 이모 과장이라는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지금 한 남자가 당신의 통장과 도장을 들고 와 돈을 인출하려 한다"면서 "혹시 대리인에게 돈 인출을 부탁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던 김씨는 농협의 이 과장이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서초경찰서 형사라는 사람이 "농협으로부터 피해사례가 접수됐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조사를 위해 경찰서로 직접 와야 한다. 그러나 그사이 돈이 인출될 수 있으니 돈을 다른 계좌로 송금해 놓는 것이 좋겠다"며 계좌번호를 하나 불러줬다. 무심코 계좌이체를 하려던 김씨는 혹시나 싶어 농협 서초지점에 문의했다. 서초지점에 이과장이란 사람은 없었다. 농협은 김씨의 상황을 자세히 듣더니 "보이스피싱 사기"라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전화 금융사기)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피해건수도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 7월까지 신고된 건수만 3889건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이상 늘은 수치다. 피해 액수만도 425억에 달한다. 최근 기승을 부리는 보이스피싱의 특징은 ▲상냥한 말투와 표준어 구사 ▲여러명이 다양한 기관을 사칭 ▲사기단이 피해자의 신상정보와 금융거래 내역 정확히 파악 ▲공공기관의 실제 전화번호 이용 ▲농어촌에 거주하는 노년층은 물론 도시에 거주하는 중장년층도 타겟으로 한다는 점 등이다.
특히 과거에는 사고나 납치를 가장하는 수법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개인정보 유출을 미끼로 하는 보이스 피싱이 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우정사업본부의 '2011년 상반기 보이스 피싱 피해예방 현황'에 따르면 개인정보 유출을 미끼로 돈을 가로채는 수법이 전체의 58%를 차지했다. 지난달 발생한 네이트온 해킹사건으로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불안심리가 높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는 것. 유출된 3500만명의 개인정보가 실제로 보이스피싱 등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도 높다. 한 네이트온·싸이월드 해킹 피해자 공식까페의 피해사례 게시판에는 20여일 만에 2만건이 넘는 사례가 접수됐다. 경찰청 관계자는 "네이트온 해킹과 최근의 보이스피싱간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반면 과거 보이스피싱의 주를 이뤘던 납치 가장은 11%에 그쳤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여러 명이 전화를 걸어 다양한 기관을 사칭하거나 발신번호를 조작하는 등 보이스피싱 수법이 날로 지능화되고 있다"며 "의심가는 전화가 걸려오면 당황하지 말고 해당기관으로 연락해 확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새로 제정된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에 따라 보이스피싱에 속아 돈을 송금했다면 112 콜센터로 신고할 수 있게 됐다. 사기범들이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시간은 5~15분에 불과하지만 금융회사마다 콜센터가 다르고 절차도 복잡해 지급정지 요청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또 사기 계좌의 명의자에게 지급 정지 사실을 통보하고 이후 2개월 동안 이의제기가 없으면 피해자는 별다른 소송절차 없이 지정한 계좌로 돈을 돌려받게 됐다. 기존에는 까다로운 법 규정 때문에 피해금을 환급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거쳐야했다.
조목인 기자 cmi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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