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감독의 역할을 뭐라고 정의하겠냐는 물음에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 로이스터는 “자기만의 철학으로 팀을 운영하기보다는 팀의 선수들을 갖고 경기를 해야 하죠”라 말했다. 이는 철저히 선수 중심인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로이스터이기에 가능한 정의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은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는 감독이 책임지는, 상대적으로 감독에 더 무게가 실리는 야구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최근 한국 야구가 감독의 캐릭터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신’부터 ‘야왕’, ‘야통’에 이르는 감독들의 각종 별명은 절반은 우스갯소리기도 하지만 각 감독의 캐릭터와 팀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개성을 발견하고 이를 차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야구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력평준화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는 2011 시즌이 올스타 브레이크를 마치고 후반기 레이스를 시작한 시점에, 8개 구단 감독들의 캐릭터와 전략 혹은 철학을 중심으로 전반기를 되돌아보고 후반기를 전망해 보았다.
야룡(野龍) 조범현의 기아 타이거즈
전략이든 운이든 상관없다, 와룡선생은 결과로 말한다
기아 타이거즈가 전반기를 1위로 마감했다. 스스로 불운을 떨쳐 낸 윤석민, 부상과 짜증에서 회복한 로페즈, 그리고 새 용병 트래비스까지 가세한 안 먹어도 배부른 6선발 체제와 이범호의 가세로 무게감이 달라진 타선으로 무장한 기아의 선전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2010 시즌을 5할 승률도 지키지 못한 채 5위로 마감한 기아와 조범현 감독이었기에 지금의 기쁨은 더욱 남다를 듯하다. ‘조갈량’이라 불리는 조범현 감독의 예전 별명이 ‘리틀 김성근’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김성근 감독 못지않게 데이터와 작전을 중시하고, 스몰볼을 선호한다. 이는 최희섭, 김상현이라는 네임 밸류의 뒷편에서 ‘FC 기탈리아’라 불리는 공격력 부재로 마음 고생한 과거가 있기에 더욱 그렇지만. 물론 작전은 성공했을 때 의미가 있는 법이라 기아 선수들의 작전 수행능력과 조범현 감독의 지략에 물음표가 붙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결과만 놓고 보면, 어쨌거나 기아는 1위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그리고 이용규, 김선빈이라는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와 얼굴만큼 야구하는 남자, 이범호의 알토란같은 활약으로 기아는 다시 챔피언 탈환과 왕조의 재건을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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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통(野統) 류중일의 삼성 라이온즈
지키는 야구에 호쾌한 공격력을 더하니 사기 캐릭터 탄생
열혈 팬을 가진 롯데 자이언츠와는 다른 의미로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은 어렵고 힘든 자리다. 삼성이라는 든든한 모기업은 FA 시장에서 큰 손을 자처하며 대형 스타 플레이어를 영입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래서 삼성의 감독은 구단 탓, 선수 탓 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전임 감독은 국보급 투수 출신에 2회 연속 코리안 시리즈 우승을 이룬 선동렬이었다. 이에 올 시즌 지휘봉을 잡은 류중일 감독의 부담감은 쉬이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이 초보감독은 기대보다 훨씬 잘 해내고 있다. 개막 전 4강에 들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삼성이 전반기를 2위로 마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리그 최강 불펜이 버티고 있는 삼성 특유의 ‘지키는 야구’에 “평소 선수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유리한 볼 카운트에선 과감하게 (배트를) 돌려라’고 주문한다”는 류중일 감독의 ‘공격 야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의 ‘No Fear’ 철학이 삼성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 롯데 팬들로서는 배 아픈 일일지 모르지만, 삼성 팬들은 류중일 감독이 선사하는 화끈한 야구 덕분에 모처럼 설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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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野神) 김성근의 SK 와이번스
야구에 미친 감독이 선수와 팬들도 미치게 만든다
2007년,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만해도 SK는 강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지휘봉을 잡은 후 SK는 3회의 코리안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야구는 8개 구단이 서로 싸우다 결국엔 SK가 우승하는 경기”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가 되었다. 김성근 감독은 SK 선수들이 특유의 혹독한 훈련으로 시즌 종반까지 지치지 않는 체력을 기르고,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 아니 나는 리그 최고의 선수다’라는 마인드 교육으로 정신력을 기르게 했다. 여기에 패한 날은 새벽까지 경기를 복기하는 집념의 데이터 야구로 예측하기 어려운 라인업과 벌떼야구, ‘출첵야구’라 불리는 잦은 투수교체로 무장한 SK는 잘 지지 않는, 지고 있어도 질 것 같지 않는, 지더라도 상대팀을 지겨울 정도로 괴롭히는 팀이 되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이런 모습 때문에 김성근 식 야구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SK가 강팀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올 시즌 SK는 에이스 김광현을 비롯해 김재현, 박경완 등의 이탈과 부상으로 지난 몇 년간 보여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7연패를 당하며 3위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하지만 방심말자. 야신이 서슬 퍼렇게 건재하고 있는 한 SK는 S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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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野顔) 박종훈의 LG 트윈스
잘생긴 조련사는 DTD의 저주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시즌 초반 LG 트윈스가 ‘신바람 야구’를 하며 치고 나가는 건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문제는 올라가는 여름의 수은주와 반비례하며 떨어지는 LG의 집중력과 순위다. 김재박 전 LG 감독이 남긴 불후의 명언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가 비수가 되어 꽂힌 곳은 결국 LG였다. 하지만 2009년 정규 시즌 종료 후 LG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된, 두산 화수분 야구의 숨은 공신 박종훈 감독의 등장은 LG에 새로운 바람을 예고했다. 취임 첫해였던 2010 시즌은 조인성의 말도 안 되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선발 투수의 부재와 부진으로 인해 6위로 마감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입단 연차에 상관없이 철저히 성적에 기반한 신 연봉제 도입이 가져온 충격요법과 160km 강속구 투수 리즈와 메이저리거 주키치의 가세, 그리고 뒤늦게 에이스 포텐을 터뜨린 박현준 등 예년과 다른 선발진의 활약은 LG 표 자율 야구와 박종훈 표 정신 무장의 아름다움 결합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결과적으로는 에이스 봉중근의 이탈, 불펜과 타선의 동반 부진으로 위태로운 4위를 지키고 있지만 ‘라뱅’ 이병규가 부활했듯이 LG가 부활하기를 팬들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감독마저 잘생긴 LG가 잘 해야, 롯데의 부진으로 흥행에 타격을 입은 프로야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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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野虎) 양승호의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시행착오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롯데 감독은 안 된다.
미실이 말했다. “사람은 능력이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러면 안 됩니다.” 리그 최고의 열혈 팬을 보유한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은 이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특히, 8888577의 암흑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로이스터 감독이 쫓겨난 자리에 앉은 사람은 더욱. 이에 양승호 감독이 택한 전략은 전임 감독과의 선 긋기였다. “프로가 우승을 못하면 의미 없다. 2등은 의미가 없다. 80승으로 페넌트레이스 1위하겠다”라며 원대한 포부를 밝힌 그는 “가르시아만한 국내타자 많다”며 멕시코 갈매기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한 번 선발은 영원한 선발인 로이스터의 믿음의 야구와 달리 마무리를 선발로, 선발을 불펜으로, 3루수를 중견수로 보내는 다양한 실험의 야구를 선보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열정적인 롯데 팬들과 지나치게 창의적이고 솔직한 감독의 만남은 고질적인 4월 부진과 맞물려 무관중 운동, 감독 퇴출 운동으로 폭발했다. 물론, 전반기 결과만 놓고 보면 공격력도 회복했고 선발진도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불 지르는 불펜과 야수의 실책은 그냥 팀 컬러로 받아들인다면, 양승호 감독이 시도한 변화가 100% 실패라고 단정짓기에는 아직 이르다. 부산에서 밤길 맘 편하게 다니려면 일단 가을 하늘에 갈매기는 띄워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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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문(野Moon) 김경문과 야광(野光) 김광수의 두산 베어스
잊지 않을게요, 당신이 보여준 믿음과 뚝심의 야구를
김경문 감독은 8년간 두산 베어스를 이끌면서 6번의 포스트 시즌 진출, 3번의 준우승을 이뤘지만 계약 마지막 해인 올해 시즌 도중 자진사퇴 했다. 김경문 감독은 달같이 온화한 얼굴 뒤에서 두산 특유의 무한 경쟁 체제를 구축했다. 특유의 뚝심, 믿음의 야구로 만족스럽지 않은 구단의 투자와 지원에도 늘 놀라운 선수들을 배출하며 화수분 야구, 미라클 두산을 이루어냈다. 리그 최고 수준의 공-수-주 밸런스에 모처럼 적극적이었던 구단의 투자로 시작한 올 시즌은 늘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두산에게 절호의 찬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잇단 사건사고와 부상 선수들의 이탈로 인해 결국 김경문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자리는 수석코치였던 김광수 감독대행이 물려받았다. 두산의 원년 멤버 출신으로 줄곧 두산 코치를 맡아 감독을 보좌해 온 김광수 대행은 팀을 잘 아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혼란에 빠진 두산을 잘 추스르고 있다. 올 시즌 두산은 목표였던 우승을 이루지 못할 지로 모른다. 하지만 팬들이 바라는 것이 꼭 우승만은 아니다. 지금 팬들이 가장 바라는 건 두산 특유의 끈끈함,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악바리 야구를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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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왕(野王) 한대화의 한화 이글스
리빌딩이 왠 말이야, 얕볼 수 없는 승부사의 용병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놀랍고, 더 대견하다. 김태균, 이범호의 동반 일본 진출로 차 떼고 포 뗀 채 치뤘던 2010 시즌과 마찬가지로, 올 시즌도 한화 팬들은 소년가장 류현진 경기만 챙겨보는 게 마음이 편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한대화 감독은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을 때 놀라운 돌풍을 이끌며 탈꼴찌는 물론 4위권까지 넘보는 선전을 펼쳤고, ‘야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포군단 한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번트를 시도하고 또 성공시키는 전술에, 롯데가 방출한 가르시아를 데려오는 신의 한 수까지, 전반기 프로야구 최고의 화제는 ‘야왕 신드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많이 이긴 것 같은데 순위는 그대로여. 아주 미치겄어"라는 푸념이 말해주듯 한화는 아직 7위고 유일한 희망인 에이스 류현진 마저 부상으로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모두가 자조하듯 리빌딩을 말하고, 고춧가루 부대라고 여길 때 투지와 집중력으로 존재감을 보여준 한화와 한대화 감독의 모습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야구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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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덕(野德) 김시진의 넥센 히어로즈
마음을 비우니 쌓이는 것은 사리 뿐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건만, 넥센 히어로즈에게는 지금까지의 시련도 부족한 것일까. 피 땀 흘려 키운 장원삼, 이현승, 황재균, 이택근, 마일영, 고원준을 남의 팀에 떠나보내고 맞은 2011 시즌에 넥센 히어로즈의 부진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늘도 울고 김시진 감독도 우는, 그런 일이었다. 다 팔아버리고 나니 당연히 부실한 선발진의 붕괴와 믿었던 강정호의 부진으로 바닥을 친 공격력은 야신 김성근 감독이 와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덕장 김시진 감독은 구단이나 선수를 탓하며 울분을 터뜨리기보다 있는 선수들을 다독이고, 남은 팬들에게 고마워하며 묵묵히 전반기를 마쳤다. 손승락, 송신영, 이보근 등 질 좋은 구원진과 강정호의 회복, 한국야구 적응을 마친 알드리지의 활약이라는 삼박자가 들어맞는다 해도 후반기 넥센의 탈꼴찌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부담이 없기에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명 투수조련사의 명성에 걸맞게 1차 지명 윤지웅을 잘 키우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물론, 고원준처럼 키워서 맥없이 뺏기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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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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