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남산딸깍발이]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라하시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2분 44초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남산딸깍발이]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라하시지.
AD

"절대로 빚지지 말아라. 누구에게 신세질 생각도 마라.굶어 죽더라도 남한테 손 벌릴 생각은 아예 마라. 빚 없으면 산다. "


어릴적 아버지가 나와 형제들에게 늘 가르친 훈요1조(?)이면서 훈요 유일조다. 그이 자신도 동네에서 농협 빚이 없는 유일한 농부였다. 그저 열심히 일해서 자급자족하며 여러 형제들을 가르치고 독립시켰다. 그래서 결핍은 밥상 위의 김치만큼 풍성했고, 또한 당연했다. 그이는 밥그릇에 밥알 하나라도 붙어 있을라치면 엄한 꾸중을 내렸다.연필 한자루, 공책 하나도 첫장부터 살펴본 후에야 용돈을 줬다. 그이는 늘 '빚 없이 살아라'는 말외에 다른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말은 훈요만조이기도 하다.

당시엔 자고 나면 이웃들이 하나둘 야반도주했다. 어느 집에서는 가장이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마을 인심도 흉흉했다. 다 빚이 문제였다. 그이는 빚지면 곧 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어느 집이 빚을 냈다드라"는 소문은 그이에게 어느 날 난데없는 고별장을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빚을 진 이웃들은 어린 자식들을 도시 공장으로, 방직공장 여공이나 식모로 내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그이에게 가정을 지키는 방법은 빚을 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이는 빚을 지는 것을 늘 두려워했고, 나중엔 아들이 행여 빚을 질까 두려워했다. 그건 가정을 이루고 살림을 꾸리는 내게 있어 그이의 위대함이다.

고백컨대 위대한 가장의 위대한 유산인 '빚 없이 살라'는 가르침을 나는 한차례 어긴 적이 있다.


15년전 곤지암 잣나무골에 집을 짓던 당시 IMF 구제금융 한복판에서 4000여만원의 빚을 졌었다. 4만달러짜리 목구조 자재는 환율 급등으로 통관할 때는 두배 이상의 값을 치뤄야했다. 자재 수입을 위해 10월에 신용장 개설한 것이 그만 12월 결제됐기 때문이다. 1달러,790원이 각각 1560원, 1870원으로 오른 상태에서 물건을 찾게 되면서 관세를 더해 엄청난 빚을 떠안게 됐다.


지금 7억∼8억원 수준인 개포주공아파트가 1억원 정도, 서울 강남 신규아파트 분양가격이 원가연동제가 적용돼 3.3㎡당 450만원 이하였으니 그 손실은 차마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정도다. 나라가 빚더미에 오르고, 나도 유탄에 맞아 비틀거릴 지경였다. 은행이자는 무려 18%로 올랐고, 빚을 청산하는데 6여년 걸렸다. 빚을 진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원망과 분노, 자책감이었다.


"다시는 빚지지 않겠다. 그 대신 재테크도 하지 않겠다"


비싼 수업료를 치루고서야 그이가 내게 남겼던 훈요1조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지금 직장인들 대부분 집 할부금을 안고 산다. 자녀들 학원비와 집 할부금을 제외하고 나면 노후대비는 꿈도 못 꾼다. 집은 감옥으로 변했다. 도시근로자들이 월급을 한푼 안 쓰고 10년 이상 모아도 서울에서 스무평짜리 집 한채 구하기 어렵다. 빚을 낼 경우 대략 20여년 이상을 갚아야하는 수준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을 포기하고 원룸이나 오피스텔에서 월세로 사는 수밖에 없다.


집(전세) 마련할 돈이 없어 사랑하는 이를 두고도 도시 난민처럼 떠도는 젊은이도 많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집 할부금 갚는데 탕진한다. 그러니 실질적인 소유는 은행이거나 장기할부주택에 지나지 않는다. 등기를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허상이다. 돈을 빌릴 수 있는 '신용'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우리를 빚쟁이로 유인하는 사탕발림이다.


빚을 내서 집 사라고, 또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말들은 순전히 협박과 다르지 않다. 날마다 빚 안질 용기를 시험당한다는 것이 힘들기만 할 지경이다.  


우리에게 곧 거대한 쓰나미가 덮칠 태세다. 가계부채 800조원이 그 진앙지다. 그 강진이 터졌음에도 아직 아무도 재앙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결국 거센 물살에 쓸리고 나서야 그 빚의 공포를 확인하게 될 듯 하다. 나, 우리, 한국경제를 흔들게 될 강진은 사실 주택에서 출발한다. 가계부채 중 300조원이 주택담보대출이다.


쓰나미는 거리에서도 핸드폰 문자로도 언제나 밀려든다. 대출하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준다고 여기저기서 난리법석이다. 하지만 빌려쓴 다음엔 태도가 달라져 엄청난 이자를 물라고 할 것이 뻔하다. 이자는 잠자는 밤에도 자란다. 이자만큼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없다. 몇년전 어느 은행 지점장이 금융사고를 일으켜 자살한 적 있다. 그런데 그의 유서에는 가족들에게 "사채업자의 빚은 꼭 갚으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도 그 가장은 사채업자의 빚을 빨리 정리하지 않고는 가족들이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죽으면서도 떨치지 못하는게 빚이고 사채업자들이다. 그들은 아내와 딸들을 노비로 팔아버릴 지도 모른다. 옛날 가뭄과 흉년, 전염병, 수탈이 이어지던 시절, 굶주린 자식들을 견디다 못해 지주의 집에 가서 쌀을 빌려오면 그 가장은 이듬해 조그만 농토를 모조리 빼앗겼다. 그 이듬해는 아내와 딸을 노비로 빼앗겼다.


그런 이치로 빚을 내면 언젠가 더 큰 걸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는 은행 지점장이니 우리들보다야 돈의 속성을 더 잘 아는 사람 아니겠는가 ? 그런 그가 오죽했으면 유서에 미안하다는 말보다 앞서 사채업자 빚부터 청산하라고 남아 있는 식구들에게 일렀겠는가 ? 그의 훈요1조이자 유언장이 어떻게 집행됐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제 수많은 유언장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든다.


아직 재앙은 오지 않았다.지금은 전조 뿐이다. 하지만 안심하면 죽는다. '집'은 '빚'을 뒤집어 놓은 말이다. '집=빚'은 서로 다른 일란성 쌍생아다. 집을 갖으려고 빚을 내면 빚은 집을 삼킨다.... 저만치 쓰나미가 온다. 누군가 물살에 심해로 끌려 갈 것이다. 하지만 국가도 잡아주려하지 않으니 세상이 자꾸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리라.


그러면서도 그이의 훈요1조는 잘못 됐음을, 그이는 내게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된다고 자꾸 거친 항변이 솟구친다.


"빚 없이 살라 하지말고 그냥 집 없이 살거라. 그러면 망하지 않는다"
그리 일렀으면 좋았을걸...


얄리얄리 얄라셩
그저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라하시지.






이규성 기자 peac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