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를 가늠하는 첫 번째 지수는 시청률이다. 하지만 인기 PD는 오직 시청률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 어떤 PD들에게 프로그램은 곧 그 자신이기도 하다. MBC <무한도전>은 김태호 PD의 작가주의적 설계도를 통해,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은 정해진 길 바깥으로 행군하는 나영석 PD의 뚝심을 통해 완성된다. 이처럼 인기 있는 예능 PD들은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 혹은 프로그램에 새겨 넣는 시그니처가 있다. 과연 그들은 현재 맡은 프로그램 외에서도 자신만의 장점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모이는 순간을 상상해보았다. 다음은 인기 PD들이 한 데 모여 자신만의 노하우를 겨루는 가상의 프로그램 <나는 PD다>에 대한 역시 가상의 제작 노트다.
이승기가 말했다. ‘넌 하락세야,’ 그리고 카라의 한승연이 인상을 쓴다. 이러면 정말 안 볼 수가 없겠는 걸? 김태은 PD가 만든 ‘X맨’ 예고편을 보며 H는 생각했다. ‘당연하지’ 코너에서만 수 없이 많은 컷을 따다 붙인 이 예고편은, 하지만 낚시였다. 서로 연관도 없을 것 같은 장면들에서 귀신 같이 따온 컷들로 만들어낸 그의 악마 같은 편집에 이끌려 <슈퍼스타 K 2>를 보던 수많은 나날들이 떠올랐다. 마침 이번 미션에서 <슈퍼스타 K 2> 편집을 담당한 신원호 PD 역시 작업을 끝낸 것 같았다. 이건... 허각 한 명으로 4부작을 만들 건가. 호기심 반, 걱정 반인 H에게 신원호 PD가 말했다. “마지막 4부를 보면 왜 이렇게 천천히 진행했는지 아실 겁니다.”
<나는 PD다> 첫 미션으로 서로의 프로그램 바꿔 연출하기를 선택한 건 어쨌든 이들의 색깔을 보여주기에 좋은 선택이었다. < UV 신드롬 >의 박준수 PD가 아니라면 누가 <무한도전> ‘탄탄대로 가요제’를 보고서 정형돈이 빅뱅 지드래곤의 패션 멘토였노라 주장하는 ‘정형돈 라이즈’를 꾸며낼 생각을 할까. 화면 속 정형돈이 지드래곤에게 “패션이 정말, 제로다!”라고 꾸짖는 동안 새로운 < UV 신드롬 >에서는 나영석 PD가 유세윤에게 뭔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UV의 음악 세계만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러면 저희도 굳이 웃기는 거 안 시키겠고요, 다만 지금 공연을 마치셨는데 우리나라 공연 문화의 꽃이죠, 2인 3각 달리기 한 번만 하시죠. 싫으시다고요. 그럼 저희 제작진이랑 2인 3각 달리기를 해서 이기시면 <엠카운트다운> 무대는 넓고 하늘은 푸르죠.” 아, 출연자를 회유하려면 저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해야 하는구나. 하지만 차분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불길한 진동과 함께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경규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니, 내가 김태호 PD랑 하기로 했던 거 ‘이경규가 간다 - 월드컵’ 아니었어?” “아니요, ‘이경규가 간다 - 양심 냉장고’인데요.” “나 지금 태호가 월드컵 열리는 브라질 보내준다고 해서 비행기 탔는데 지금 이게 알래스카 행이라네?” “알고 가는 거 아니셨어요? 알래스카 김만덕 씨에게 냉장고 파시는 게 이번 촬영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뭐, 팔아? 알래스카에서 냉장고를?” 아, 어쩐지 이경규 선배가 군말 없이 응했다고 했더니 이런 트릭을 짰구나. 자신이 만든 감동의 프로젝트가 이렇게 변모한 걸 보면 원조 김영희 PD는 어떤 마음일까. 정작 김영희 PD는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달동네 특설 무대 위에 올린 감동의 무대를 보고 흐뭇해하느라 이 일을 모르겠지만.
이 때 갑자기 조연출이 다급하게 외쳤다. “PD님! 스포일러 떴어요!” 조연출이 가리키는 모니터에는 장혁재 PD가 연출한 ‘1박 2일’에 대한 스포일러 기사가 떠있었다. ‘김하늘과 이승기, 새로 찍은 ‘1박 2일’ 여배우 특집에서 사랑의 어부바 게임으로 서로의 마음 떠봐. 김수미, 나도 호동이보단 승기가 좋아.’
또, 스포일러가 떴다. 나영석 PD가 리메이크하기로 한 프로그램이 <명랑운동회>라는. 이쯤 되면 촬영 자체를 새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촬영하느라 야외로 나간 나영석 PD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우선은 이번 미션 자체를 올 스톱하고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 하지만 <열전! 달리는 일요일>을 맡은 김태호 PD는 난색을 표했다. “지금 출연자들이 뉴질랜드로 간 상황인데요.” “네? 아니 이건 그냥 장애물 넘고 그런 프로그램...” “이게 돌격대장도 있고 공주도 구하는 그런 판타지적인 미션이잖아요. 그래서 <반지의 제왕> 찍었던 뉴질랜드에 가서 아예 판타지 영화처럼 만들어보려고요.” “아니, 이건 그냥 게임...” “아무래도 하나의 틀에 갇히기보다는 계속 프로그램 특성에 맞게 미션을 확장하면 좋을 거 같아요.” H는 조금 어지러웠다. 뭐, 어차피 스포일러가 터진 건 나영석 PD니 그쪽만 수습하면 되겠지. 하지만 다시 불길한 진동과 함께 수화기로 이경규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원래 ‘배워봅시다’는 배우는 사람이 웃기는 코너 아니야?” “그랬...었죠?” “나 지금 신원호 PD랑 ‘배워봅시다’ 리메이크 찍는 중인데 나보다 성악 가르쳐주시는 교수님 위주로 찍고 있어.” “아, 서정학 교수님이요.” “가르치다가 ‘고마워요~’ 이런 거 날리는데 나 이번 미션에서 몇 초 안 나오고 이분만 나올 거 같아.” “아, 선배 잠시만요, 지금 받아야 할 전화가 와서요.” 나영석 PD다. “나 PD님! 지금 혹시 PD님 미션 관련해서 스포일러 나온 거 알고 있으세요? 그것 때문에 변경을 좀...” “아, 그러면 <명랑운동회>가 아니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가 출연자분들을 설득해서 근처 부대에 가서 <우정의 무대>를 찍을 게요.” “아니, 지금 거기서 어떻게...” “어차피 공굴리기 게임 중이었으니까 이걸로 재촬영이랑 입수 걸고 스태프 대 출연자 대결 하죠, 뭐.” 그의 통화 소리를 들었는지 출연자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지만 나영석 PD는 꿋꿋하게 외쳤다. ‘땡!’
김태은 PD의 <길의 순결한 아롱사태>, 박준수 PD의 <면식왕 리턴즈>, 장혁재 PD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떴다>... 맛집 프로그램이라는 포맷 안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미션을 냈더니 제목부터 PD 취향으로 만들어졌다. 아롱사태 집을 소개하며 중간 중간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소개하는 ‘미디움 레어 사운드’ 코너까지 만들었다는 <길의 순결한 아롱사태>도 식욕을 자극했지만 면이라면 하루 세끼도 좋은 H가 가장 기대하는 건 역시 세계 최초 음식 모큐멘터리를 표방한 <면식왕 리턴즈>다. 물론 또 ‘뻥’이 반 이상이다. <옥보단 3D> 제작팀의 지원을 받아 면발을 손에 잡힐 듯 보여준다고 하는데 H가 영수증으로 확인한 <면식왕 리턴즈> 제작비는 ㅇ라면 3봉지 값 2250원이 전부다. 어쨌든 여러 험난한 일들을 거쳐 여기까지 <나는 PD다>를 끌고 왔다는 생각에 H는 스스로 뿌듯했다. 시청률도 동시간대 1위로 올라섰고 이제 탄탄대로만 걸으면 된다.
“PD님! 또 저희 기사가!” 뭐야, 또 스포일러냐. 이젠 익숙해진 H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기사를 읽었다. ‘<나는 PD다> H PD 하차. 지금까지는 파일럿 개념. 앞으로 방송사 파격 지원 아래 본격적 시즌 2 시작. 프로그램 새 PD는...’ 기사를 읽던 H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PD다> 우승자에게?’ 순간 무대 위에 선 7명 PD의 눈이 번쩍 빛났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