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통일 준비 비용 수백억원 재계에 요청...국정홍보처 폐지 후 기업 부담 급증
[아시아경제 이정일 기자] 정부가 수백억원에 달하는 대국민 통일 캠페인 비용을 일방적으로 재계에 떠넘겨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통일 수혜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지만 재계는 '억지 논리'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30일 재계에 따르면 정부는 통일에 대비한 대국민 캠페인의 일환으로 내년에 청소년 병영캠프를 실시할 예정인 가운데 이 비용을 삼성ㆍ현대차ㆍLG 등 대기업이 부담해줄 것을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전경련에 협조를 구한 이른바 '통일 준비 비용'에는 국민들의 보안 의식을 고취하고 통일의 당위성을 알리는 TVㆍ신문 홍보비도 포함돼 있다. 당초 정부는 사안별로 기업에 별도 비용을 직접 요청할 계획이었지만 반발을 의식해 전경련이 총대를 메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에 따라 재계가 마련해야 할 통일 준비 비용은 기업별로 매출 규모에 따라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는 "통일은 우리 경제의 성장축"이라면서 "수혜자가 통일 준비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밝혔다.
앞서 통일부는 29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2011년을 바른 통일 준비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 후속 조치로 정부는 대통령직속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도하고 국가브랜드위원회가 거들어 청소년 병영캠프, 대국민 통일 캠페인 등을 추진해나가도록 한 것이다.
재계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G20 개최와 월드컵ㆍ동계올림픽 유치전 등 국가 대사를 사실상 재계가 홀로 책임지는 상황에서 통일 준비 비용까지 부담토록 하는 것은 '염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대기업 임원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건립도 총 공사비 700억원 가운데 상당 부분을 전경련을 통해 재계가 부담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걸핏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며 궂은 일을 떠넘기는 데 대해 기업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도 "통일이라는 대명제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수혜자 부담 원칙은 억지에 가깝다"며 "정부가 버튼을 누르면 돈이 튀어나오는 자동판매기쯤으로 기업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착각할 정도"라고 씁쓸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경련은 기업들을 설득할 논리 개발에 고심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분위기다.
정부가 재계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적 시각은 정부 내에서조차 제기될 정도다. 정부 관계자는 "통일 준비 사업은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인데 처음부터 재계에 손을 내미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꼬집었다.
국정홍보처 폐지 이후 재계 부담이 크게 늘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 재계 임원은 "이명박 정부가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국정홍보처를 폐지하면서 모든 부담이 전경련을 통해 재계로 전달되고 있다"면서 "전경련이 필터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측면도 크다"고 지적했다.
이정일 기자 jayle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